판사들의 "명심보감"
회사 돈 286억 원 횡령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두산그룹의 박 용오-박 용성 전 회장과 박 용만 전 부회장 3형제가 1심 선고공판에서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것은 일반 세인(世人)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디 일반 세인들뿐인가. 최근 이용훈(李 容勳) 대법원장도 이에 대해 몇 마디 한 모양이다.
법관 인사에서 승진한 지방법원 부장판사 19명을 대법원장이 초청,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 용훈 대법원장은 “내가 법관들의 판결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는 안되고, 간섭할 생각도 없지만 이 판결은 사법부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남의 집에 들어가 1억원의 물건을 훔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판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 놓고 200억, 300억 원씩 횡령한 피고인들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면 국민이 수긍하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번 이 용훈 대법원장의 발언을 둘러싸고 더러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일부 판사들은 “유전불벌(有錢不罰) 논란”을 일으킨 판결에 대해 대법원장이 할 말을 한 것 아니냐”는 반응인가 하면, 다른 일부 판사들은 “대법원장이 구체적 사건의 판결에 개입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 했다”는 의견이다. 또 다른 한 판사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일선 판사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역시 “법관의 독립성 훼손”을 우려했다는 소식이다.
대법원장을 포함, 이들 법관들의 발언들을 분석해 보면 서로 상반되기는 하지만 모두 할 수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된다.
200억 원 이상의 거액을 횡령한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법원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판결이라는 대법원장의 지적이나,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판사들의 얘기,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대법원장의 발언이 법관의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다른 일부 판사들의 견해들까지도 그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서로 생각은 달리하고 있지만 아마 모두가 사법부의 신뢰 실추와 법관의 독립성 훼손을 걱정한 나머지 마음에서 울어나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리라.
문제는 대법원장이건 판사들이건 권력으로부터, 금력으로부터, 그외 정치적-사회적 유혹으로부터 용감하게 탈피, 오로지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권의 독립을 지켜나갈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데 있다. 헌법은 재판권 독립과 관련,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에 두산그룹 오너 3형제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도 담당 재판관이 진실로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내린 결과라면 탓할 수가 없다. 또한 2심 3심까지 갈 경우도 역시 재판관들이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비추어 1심의 집행유예 선고가 타당하다면 같은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용훈 대법원장의 지적이 “이면함의(裏面含意)”가 무엇이든,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평판사도 아닌 대법원장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법관의 독립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기에 그는 “법관들의 판결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강조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가 우려하는 것은 엄청난 거액을 횡령한 피고인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림으로써 혹시 사법부의 신뢰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1억 원이 아니라 불과 1000만 원대의 공금만 횡령해도 구속수사를 하고, 실형을 선고하는 예가 비일비재다. 하물며 거액 횡령 피의자가 집행유예를 받았으니 최소한 법 집행의 형평성 시비는 있음직도 하다. 이를 두고 대법원장이 자기 생각을 밝힌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대법원장의 말 한마디에 판사들은 재판에 영향을 받을 필요도 없다.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면 그만이니까.
저간의 사정(事情)이 어떠하든, “남의 집에 들어가 1억 원어치 물건을 도사진둑질한 사람에게도 실형을 선고하는 데, 200억, 300억 원씩 횡령한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국민이 수긍하겠느냐”는 대법원장의 말은 판사들이 음미 할만한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법관들에게 이보다 더한 명심보감도 흔치 않을 테니까.
김 경 호 (상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