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족 “진상규명 여전히 걸음마 단계”
행불인 유족들 “4월 따뜻한 봄 왔지만 마음은 더욱 시려” 한국전쟁 직후 사망 추정만…4·3 학살 끝나지 않은 아픔
추운 겨울을 보내고 4월 봄을 맞았지만 제주4·3유족들의 마음은 더욱 시리다. 날씨는 한결 따뜻해졌지만 응어리진 4·3아픔이 뼛속까지 새겨졌기 때문이다.
제73주년 제주 4·3추념식을 하루 앞둔 2일 제주4·3평화공원 내 설치된 행불인 위령비에는 드문드문 4·3유족이 찾아왔다.
올해에는21년만에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됐고, 4·3사건 당시 군법회의 등의 재심사건에서 무죄 판결도 나왔다. 그러나 이들 유족들은 “이제야 진상규명을 위한 걸음마 단계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강철훈씨(62)는 아버지(강상휴씨)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에 절을 올린 뒤 한참동안 응시했다.
강상휴씨는 1950년 6월 하순경 경인지역에서 희생된 행불인이다.
강철훈씨는 “당시 제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 못한다. 아버지는 4.3사건 당시 일반재판을 받고 경인지역 수형소로 끌려갔다”며 “당시에도 브로커가 있었는데 돈을 주면 수형소에서 빨리 빼주겠다고 해서 어머니가 소를 팔아 돈을 줬지만 마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없던 죄명을 만들어 옥좼다. 당시 군경은 제주도민을 개나 닭 취급했다.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강씨는 “4·3특별법 개정으로 제주에 봄이 왔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걸음마 단계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3 사건으로 인해 잃어버린 마을 비문을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다. 화해와 상생을 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왜 제주 4·3이 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온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제주4·3의 도화선이 됐던 관덕정을 논하는데, 당시 아녀자와 아이들이 군경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군경이 사과하고 철저한 원인을 규명은커녕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며 “제주의 완전한 봄이 오기 위해선 진상규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임순씨(77)의 아버지 김두옥씨도 4·3행불인이다. 김두옥씨의 비석에는 1950년 6월 하순경 경인지역에서 행방불명됐다고 세겨졌다.
김임순씨는 “4월이 되면 마음이 시리다. 비석 앞에서 아버지에게 편안히 잘 계시는지 안부를 전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형무소로 끌려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된 데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 유해도 찾지 못한 유족이 너무나 많다. 정부가 유해발굴 사업에 더욱 힘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말했다.고은규씨(46)는 행불인인 할아버지인 고두석씨의 비석을 찾았다. 고씨는 평소에는 큰 아버지와 함께 오는데 이날은 홀로 찾았다. 고두석씨는 1949년 10월 초순경 제주국제공항 정뜨르비행장에서 행방불명됐다.
고씨는 “4월만 되면 울화통이 터진다.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제주 4·3은 정치적으로 이용만 됐다. 특별법이 개정됐다고 해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광주5·18은 진상규명이 잘되고 있는데 제주 4·3은 그렇지 못하다. 특별법이 개정됐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에 걸친 불법적인 군사재판에서 제주도민 2천530명이 총살을 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중 형무소에서 병들어 사망, 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진상조사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에게 4·3 학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