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개교와 시련극복과정

2006-02-16     제주타임스

제주여성교육의 효시…시련ㆍ아픔 딛고 우뚝

6ㆍ25땐 피난학생 임시로 수용하기도

 제주여자고등학교의 탄생은 제주 여성들의 고등교육을 전담 할 교육기관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개교 과정에서부터 험난한 여정을 밟아 왔다. 일제하에서 해방과 6.25전쟁와중에서 피난학교로의 역할과 천막동에서 발 딛을 틈 없이 빼곡히 앉아 강의를 받아야 하는 등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한 아픔을 겪어왔기에 제주여자고등학교가 오늘날 제주여성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여자고등학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뒤안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 제주고등여학교의 개교
 제주여자학원은 제주시 이호1동 출신인 호은 김홍빈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8형제가 1944년 10월 제주읍 사무소 2층에서 읍내 유지들과 숙의한 끝에 학교설립을 최종 결정하여 추진하게 된다.
 전쟁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학교설립 추진을 어렵게 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학교설립을 실현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45년 10월 제주시 일도리에 1,500평의 부지와 70평 건물을 구입하고 개보수하여 교사를 마련하고, 이듬해인 1946년 2월 10일 도내 유지였던 홍순녕씨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교사4명과 학생수 1학년 1학급, 2학년 1학급 등 90명의 학생으로 제주여성교육의 산실인 제주고등여학교를 출범시켰다.
 초대교장인 홍순녕 선생은 당시 도내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분으로 존경받았다. 서울농대 출신으로 공립 제주농업학교에서 5년간 근무했었으며,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기고 하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도지부 부지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초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던 분이다.
 학생들의 구성도 다양하였다. 도외에서 공부하던 제주출신 학생들이 제주에 고등여학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고향에 돌아와 편입학 학생도 많았으며 이 중에는 경기, 숙명 등 유명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꽤 있었다고 하였다.
 해방 직후에서 미군정시기까지 도내에서는 처음부터 정규 중등학교로 설립된 경우는 제주고등여학교와 대정공립 초급중학교(1946. 9. 24.설립)뿐이었다. 이외 중학교들은 모두 중학원(중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시설 학술 강습소)의 과정을 거쳐 설치되었다. 그래서 당시 각종 중학원에 다니던 학생들이 편입학도 많아졌다. 수용인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학생들이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 시험으로 선발하였고 입학 당시 90명이던 학생수가 졸업할 때는 1회, 61명, 2회 71명 등 132명이 되었다.
 학생들이 출신지역은 제주읍내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당시 지방에서 부자라고 해도 여성교육에 대해서는 폐쇄적이었던 때라 공무원이나 교직원 자녀들 중 일부가 여학교에 다니는 정도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고등여학교는 본도에 피난학교가 정식으로 설치되기 전에 피난 학생들을 일시적으로 수용키도 하였다. 1951년 당시 피난학생으로 등록된 학생은 229명이나 되었으며, 당시 제주고등여학교의 교사는 육군에 내어준 체, 삼성혈 천막교사에서 수업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수업은 육지부에서 피난 온 저명 교수들이 직접 가르쳤으며, ‘천막하나에 피난학생들을 포함하여 한 학년 전체를 수용하여 120명 이상이 학생들이 천막교사를 빼곡히 매워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고 당시 동문들은 회고하고 있다.
 피난 온 교수 가운데 연세대 교수인 조의설, 장지영 선생, 서울대 교수인 황득현 선생, 그 밖에 박상현, 김인식, 유기묵, 김금환 등 서울 일류대학 교수들이 짧게는 서넉달 길게는 2년 가까이 강사로서 피난학교와 제주여중고생들을 가르쳤다. 6.25전쟁 와중에서 제주여고1.2.3회 졸업생들은 저명교수의 수업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 제주여고의 탄생과 시련의 극복
 6.25라는 전시상황 속에서도 정부의 학제개편에 따른 설립자의 의지 및 제주도 당국의 적극적인 노력과 주선으로 1951년 5월 6일 제주여자고등학교 인가신청을 한 후 그 해 8월 31일자로 6개 학급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 동년 9월 25일 1학년 39명, 2학년 7명 각 1개 학급씩 모두 46명의 학생으로 도내 최초의 여자고등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이는 학교인가와 개교가 우연찮게도 모두 오현고등학교와 일치하고 있다.
 학교는 개교하였지만 1951년 2월 육군 조병창으로 학교건물이 증발된 후 삼성혈 천막교사로 이주하면서 교사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구상은 조병창으로 증발된 현 교사는 고등학교로 사용하고 중학교는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여 새로운 교사를 갖추려는 것이었다. 1952년 9월 6일 사친회 합동임시총회에서 삼성혈 앞2,774평(현재의 칼호텔 자리)에 3개년 계획으로 12학급 규모의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15일 본관3개 교실이 완성되어 삼성혈 천막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칼호텔 자리의 본관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땀 흘려 땅을 고르고 건축 현장에서 벽돌을 날랐으니, 그야말로 제주여고의 희비와 애환이 섞인 학교의 본관건물 1층 8개교실, 2층 9개교실 석조건물을 완공하기까지 공사를 시작한 1952년부터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모하여 1963년 1월 완공하였다. 실로 어려운 시대적 여건 속에 교사 학생들이 눈물겨운 사연이 녹아들면서 완성되었다.
 1960년대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학교시설 보완을 위해 당시 이경수 교장이 기울인 노력은 가히 헌신적이었다. 재단측이 지원이 줄어들고 학급수는 계속 증가하게 되자 이 교장은 AFAK:USOM(주한미군경제원조처)에 도움을 요청하여 2층 동쪽 3개교실을 증축하고, 1964년에는 서쪽 2개교실을 증축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국방부의 대민 지원 사업의 하나인 교실난 해소 지원 자재를 따냄으로써 2개 교실분의 목재와 시멘트를 지원받고 동쪽별관 2층건물 4개 교실을 신축하였고, 정부의 강력한 중·고 분리 지시에 의해 1971년 1월에는 별관 건물에 4개의 교실을 증축하여 신관건물로 명명하게 된다. 학교 교훈도 ‘실력양성, 부덕함양’ 이었는데 ‘진선미’로 바꾸어 달았다.

강   선    종 (기획실장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