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마(駿馬)를 헐값으로 강제 매수, 탈취한 목사 등이 있어 부정부패는 계속
세종16년(1434) 마도적(馬盜賊)은 가족과
함께 650명을 강제 평안도로 이주시킴
1. 제주마 점마(點馬)와 관기(官紀)의 폐단(弊端)
제주목사는 매년 봄과 가을에 말을 한곳에 몰아 점열하는데 진헌마나, 어승마로 공마할 말이 있으면 비록 민간이 기르고 있는 말이라도 관가에서 사육하다가 공마에 충원하였다. 조정(朝廷)에서도 마정이 허술하지 아니한가 걱정하여 경관(京官 또는 점마별감)을 파견하여 시행하는 행차를 점마라고 한다. 이 행차(行次)는 매년 3, 4월에 시작하여 7, 8월에 이르는데, 농사일이 아주 바쁜 시기에 말들을 몰아오고 한곳에서 점열할 때에 삼읍의 백성들은 모두 문안드리고 대접하는 일에 분주하게 되니 농사일을 못하는 자가 많아 흉년 농사가 되는 일도 빈번하였다. 경관(점마별감)이라는 자가 모두 무관을 거느렸는데 자비로 침식을 조달하는 것도 아니고 통솔도 되지 않았다. 또한 국마(國馬)의 임신여부 결정도 오직 뇌물의 정도에 따라 결정하였다.
삼읍 수령이 관할지역 안의 품관이나 백성으로서 말을 사육하고 있는 자를 조사하고 마적에 올려 두었다가 전마(戰馬)나 차비마라고 하면서 공공연히 억지로 빼앗았고 예전부터 전례(前例)가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여러 가지 농사를 할 수가 없어 생활필수품은 육지에서 사서 쓰고 생계는 목축(말)업에 의지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 1필을 빼앗긴다면 모든 가족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했다.
제주도에서는 매년 늦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수령과 그 자제(子弟) 및 군관(軍官)들이 사슴과 노루사냥을 나갈 때면 모두 민간의 수말을 빼앗아 종일 달리니 지쳐서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민가(民家)에서 수말이 분만되면 이를 죽여 기르지 않았다. 그리고 수령은 백성들이 말을 공납하려고 하지만 진상하는 것도 막아서 자기 말로 소유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선조40~41년(1607~1608) 때 잔악하고 재물을 탐하여 삼읍의 준마를 헐값으로 강제 매수하거나 탈취한 제주목사 이응해는 4년 후에 사헌부가 적발하여 그 죄를 간하였으나 광해군은 처벌을 윤허하지 않아 부정부패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1618)때에는 점마관 양시헌을 파견하여 김만일목장(私牧場) 등에서 전마(戰馬) 수천 필을 뽑아 오게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만일 4부자에게 무거운 형을 가하고 종마용으로 금지된 암말 수천 필을 수탈하려다 물의가 일어나 양시헌을 파직하고 암말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또한 인조 7년(1629)에 제주목사 이진경은 출세하려고 예차마(어승마로 합당한 2필중 1필은 진상하고 남은 1필)를 봉진하였으나 이것이 선례가 되므로 파직하고 죄로 징벌하도록 병조에서 청하였으나 인조는 그가 바친 말만 돌려주어 죄를 묻지 않아 관기가 문란하였다.
2. 제주마 도적과 처벌
조선초기부터 마(馬) 가격이 노비 값에 비하여 매우 높았으므로 일반 백성들도 신고만 하면 말 매매가 가능하였기에 말을 훔쳐 몰래 팔아넘기는 현상도 나타났다. 말 도적을 거골장(去骨匠), 백정(白丁), 화척(禾尺)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말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태종 15년(1415)에 마적부를 작성하고 매매(賣買)를 허락하는 표시로 시(市)자 낙인, 종마(種馬)로 이용될 말은 부(父)자 낙인을 찍도록 하여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조선시대의 말 중시 정책은 한라산 중산간 지역이 모두 목마장(10소장, 3산장)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목초지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도민들은 상대적으로 농경지 감소 및 특히 말 점검을 위한 수시 동원은 농번기와 겹쳐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흉년이 들면 도민들은 생활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서 말 도적이 되거나 제주도로 귀향 온 범죄자들이 말을 훔쳐서 도살을 거리낌 없이 하여 말 도적으로 변한 것과, 제주도 지형이 혈(穴;굴치)이 많아서 말 도적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말 도적에 대한 규정은 태종 4년(1395)부터 시작하여 조선말기 까지 엄히 다스렸다. 그 처벌은 초·재·삼범 등 죄의 횟수에 따라서 그 형량이 달랐다. 주범은 사형이었으나 대체로 곤장 80~100대를 때리고 얼굴이나 팔에 재마(宰馬), 절도(竊盜), 도살마(屠殺馬) 등의 글자를 새겨 넣거나 수군에 편입 또는 유배시켜 관노비로 삼았다.
제주마 사육에 종사하는 마감, 군두, 군부, 목자들에게는 15필 이상을 잃어버리면 그 책임을 물어 그 직을 파직하고 가족은 변방으로 이사를 시켰으며, 5필 이상을 잃어버리면 하등 시키고 변상토록 하였다. 그리고 도적을 체포한 사람은 면포 10~50필을 포상하였다.
제주도민 가운데는 과중한 공부(貢賦;공물과 세금)에 견디지 못하여 소와 말 도적으로 전락한 사람도 많았다. 도적이 많아지는 요인을 경작지가 좁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생활이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대책으로 땅이 넓은 평안도 지역에 사민하자고 건의함으로 그 가족과 함께 세종16년(1434) 병조의 건의로 650명을 강제 이주시켰고 세종17년에는 재범이상만 평안도로 다시 이주시켰으나 이주자중 경미한 사항(집안 행사시 도살)과 독자(외아들)등 100명 정도는 제주도로 돌려보내 어버이를 공양케 하였다. 그리고 조정(朝廷)은 평안도에 정착하게 각 고을에서 이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넉넉히 주어 생활에 불편이 없게 하였다. 또한 이들을 고공(雇工)의 예에 의하여취역케 하되, 병약한 자는 구호양곡을 받도록 하였다.
제주도민들이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으므로 자신 소유의 말을 도살하거나 남의 말을 훔쳐서 도살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해 나간 사람들을 일컫는 마 도적(馬盜賊)은 계속되었다.
일본강점기때는 방목 소와 말(放牧牛馬)의 도둑이 한때 아주 많아서 총범죄의 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소는 온순하여 사람의 접근이 용이하며, 방목두수가 많아지면서 말 도둑보다 소도둑이 많았다. 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소와 말의 증명서(牛馬籍)을 만들고 이 적(籍)이 없는 것은 매매를 금하고 가죽까지 우마적(牛馬籍)을 붙이지 않으면 매매를 못한다고 하여 도외 반출 시에도 엄중한 검사를 실행한 바 이 범죄는 근절하였다.
지금(2005년)도 경마·승마·식육용으로 말 가격이 비싸므로 축산물 처리법위반인 밀도살하는 사람들이 있어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고 있다.
[ 제주마 매매가격 ]
조선시대 제주마 매매가격은 시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에 보면 별마, 진상마의 상등은 면포 50필, 중등은 면포 45필, 종마(씨수마)는 면포 30~40필, 씨암말은 면포 20~30필, 토마는 면포 30~40필이었다. 또한 말 값은 상등 수말은 쌀 20석, 중등이나 상등 망아지는 15석, 하등 수말이나 중등망아지는 10석을 지급하도록 하되 그 반값은 면포로 주도록 했다. 이는 당시 노비(奴婢) 매매가격의 3배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현재 경주용마 500만원이상, 번식용마 400만원이상, 씨수마(경주능력이 우수한 마) 2,000만원이상, 식용마는 200~300만원으로 거래가 되고 있다.
[ 목자(牧子)와 보인(保人)의 의복 ]
탐라순력도의 공마봉진, 조천조점, 별방시사, 정의조점, 애월조점 등에 그려진 것을 보면 목자(牧子)와 보인(保人)의 대부분 모자는 벙거지(털벙것; 소가 털갈이를 할 때 모았다가 콩풀로 결어 모자틀에 넣어 찍어낸 모자.)를 쓰고 바지와 저고리에 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었으며 윤유리나무 막대기(채찍)를 들고 있다. 목자들은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 가죽발레(재료는 개가죽 2마리 분)를 벗겨지지 않도록 끈으로 허리에 묶거나 어깨에 멜방을 달아 고정시켰다. 가죽발레는 방한용으로 추운 겨울철에 산야를 다녀야 하는 목자들이 사용하였다.
목자는 혹한과 비바람, 더위 등의 악조건에서도 활동에 간편한 의복이 필요했다. 겨울철은 짐승의 털가죽을 이용한 가죽두루마기(개 12마리 분량), 가죽발레(개가죽), 가죽감태(오소리 가죽), 가죽버선(가죽신), 털벙것, 태왈(겨울철 눈이 많이 왔을 때 신는 것 ;설피) 등이다. 이러한 털가죽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므로 목자들의 부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갈옷을 껴입고 가죽두루마기 대신 비옷으로 입는 도롱이(기다란 띠를 사용하여 만들다; 제주도에서는 우장 ·자부세기·좁세기)를 겉에 입기도 했다.
갈옷은 여름철에 노동복으로 농사일, 목축업,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는 옷으로 더러움을 타지 않고 빨래가 잘 되며 통기성이 좋고 땀이 잘 배어들어도 몸에 달라붙지 않으며, 잘 마르고 촉감도 좋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빳빳하고 질겨서 가시덤불이나 곶자왈 사이를 지나가도 잘 걸리지 않는 옷으로 제주의 자연환경에 알맞은 노동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