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여성의 시대다
세상의 반쪽은 여자다. 2005년도 성비는 여성이 49.6% 남성은 50.4%이다. 이 세상의 반쪽인 여성들이 밝은 감성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은 곳으로 변화 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양로원, 고아원, 노인당 등에 무료 봉사자는 거의 여성들이다.
요즘같이 세계화시대, 정보화시대의 출발점은 감성이다. 미래사회는 여성이 시대라는 주장이 결코 과장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성이 말라버리면
지성의 샘도 고갈된다. 감성과 지성은 얼핏 반대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서로 보완적이라고 한다. 여성에게 이런 풍부한 감성이 주어진 것은 천부적 행운이요. 하느님의 주신 축복이다.
그러나 여성이 가부장 문화에서 사회적으로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지난 몇 년이다. 가히 ‘여성혁명’이라고 일컫는 지난 10년 동안 여성의 위상 변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주 고무(鼓舞)적인 일이다. 과거 금녀(禁女)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왔던 정치권, 재계, 법조계 등의 두터운 장벽은 여성엘리트들의 파워 앞에 하나씩 허물어지고 있다.
여성학의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산업화 역군으로 동원된 공단지역의 여성노동자, 소위 ‘공순이’들로부터 여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여성의 인권과 권익향상에 대한 제도적 정비는 남녀차별금지법, 성매매금지법, 민법에 호주제 폐지, 또 관습법으로 인정되어 오던 중종회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도 확보되었다. 법과 제도적 장치는 완벽하리만치 개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적인 변화에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통전(通典)하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여성의 삶을 어둡게 하고 여성의 감성을 메마르게 하고 있다는 보도를 본다.
이런 가부장적인 문화를 개혁하는 데는 여성들의 의식이 문제가 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특성을 살려야한다. 그리고 성의식의 민주화에도 점차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본다. “화냥”과 “정숙”은 정반대 개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때에 따라서 개념이 달라져야하며, 또한 성에 대해서 여자는 수동적이고 남자는 능동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성의 민주화를 창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분위기를 살려야 남자와 평등 할 수 있다. 꽃마다 분위가 다르고 나무도 그렇다. 삶도 제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것은 한 여성의 구성하는 미의 요소 중 가장 최후의 것이며 또 종합적인 것이다. 그 사람의 갖고 있는 외적, 내적 요소의 총화로 나타나는 것이 자신의 분위기요 색깔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갖고 있는 독특한 멋이요, 맛이요, 냄새요, 향기다, 이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파장과 같아서 조용히 그로부터 밀려나와 주위 사람들 가슴에 와 닿는다.
어떤 이는 차갑게, 또 어떤 이는 뜨겁게 와 닿는다. 남자들은 바쁜 일과 중에서도 문득 이런 감성적인 그리운 사람이 떠오른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의 따뜻한 감성적인 인간미 속에 흠뻑 젖어든다.
이런 인간미가 옛 가요에 나오는 “최신사댁 셋째 딸” “갑순이와 갑돌이”의 이미지이다. 또 최근에 끝난 MBC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한국의 여성들을 뜨겁게 열광 시켰다. 남성들에게 칭찬받던 착하고 예쁘기만 한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엎은 “김삼순”에 일종의 대리 만족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드라마 속 “김삼순”의 인기는 “무릇 여자는 결혼해서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무언의 가부장적인 남성주류사회의 압박을 벗어 던지려는 한국여성들의 당찬 목소리일 수도 있다. 여성은 감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물리적인 양성 평등을 넘어 여성성과 남성성이 함께 변화해 “윈-윈”하는 새로운 “성의식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 그 것은 여성은 감성을 키우고 남성은 배포를 키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수필가 김 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