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각급 학교ㆍ대학의 어제와 오늘(43) 제1편: 제농에서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로 되기까지

2006-02-02     제주타임스

사립 의신~제주관광산업고 96년간 파란많은 '제농'역사

 근대 일백년(올해로 설립 96년째)에 가까운 역사의 격랑속을 겪어온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인 제주농림학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발전을 계속하여 왔다. 그 역사의 전개과정은 1)경술국치(1910)후 일본식민지하에서 오욕과 통한으로 점철된 36년간 민족수난의 시대와, 2) 조국광복과 국토분단에서 야기된 혼란과 갈등의 시련기, 3) 그 후 영광된 도약을 약속하는 오늘날까지의 발전기로 3단계로 살펴볼 수 있다. 제주농업학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3차에 걸친 학교 이설에 맞추어 볼 때 오현단 구교지 30년, 광양구교지 35년, 노형동 현 교지 31년의 역사와 같이 하고 있다.

 제농(濟農)96년간의 교명변경 또한 파란 많은 제농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1910년 사립 의신학교(義信學校)가 폐지되고 공립 제주농림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12년-1920년간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로 개편 3-10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수업연한의 변화가 많았으나 제주공립농업학교의 교명을 사용하였다. 1948년부터 4년간은 제주공립농업중학교로서 37-40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40회는 학제변경으로 6학년 4학년 3학년이 동시에 졸업하는 예외적인 일도 있었다.

제1회가 졸업하던 1952년 이후 제주농업고등학교로 50년 가까이 정착되다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더 나아가 지식정보화사회로 급속도로 탈바꿈하게 되면서 2000년 3월 1일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는 제주도 중등교육의 효시로서 제주의 대표적 상징인 ‘제주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자 현재 추진 중에 있다. 2006년 2월 제95회 졸업생까지 15,441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는 도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근대 제주사회를 이끌어온 인재를 배출한 산실의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 있다. 
○ 제농(濟農)의 탄생과 항일운동
 선진국에 있어서 근대학교의 발전과정은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84년 갑오경장을 통하여 구각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신교육, 신문화의 도입의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제주에 있어서는 1906년(고종43년)에 윤원구(尹元求)가 제주군수로 부임하여 1907년 7월에 중등교육 기관인 사립의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초등교육 기관인 공립제주보통학교를 설립, 개교하였으니 이 두 학교가 본도 근대학교의 효시가 된다. 당시 윤원구 군수는 개화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선각자로서 부임하기 이전부터 신식교육과 서구의 새로운 사조에 깊은 이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는데 애월읍 곽지리 상동에 미국에서 돌아온 김성실(金性實)이라는 개화사상을 지닌 청년이 살고 있는 소식을 접한 윤원구 군수는 김성실의 집을 자주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제도와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는 신식 학교인 의신학교와 제주보통학교의 설립과 개학에 참고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쇄국정책에 묶여 한문교육밖에 모르고  서양에 대한 지식을 전혀 알 수 없던 여건아래서 윤원구 군수의 근대학교 창설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신학교 설립 소재지는 본도 사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현재의 오현단 주변이다. 이곳은 이조 세종 임금때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한 령곡공(靈谷公) 고득종(高得宗)의 주택이었던 유서깊은 유허지(遺墟地)이다. 그 뒤 통칭 명도암(明道庵)선생이라 부르는 김진용(金晋鎔)의 제의에 따라 이회(李?) 제주목사가 장수당(藏修堂)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본도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귤림서원을 건립하여 가르치는 등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명소이다.

 사립의신학교는 1910년 4월에 공립제주농업학교로 인가되고 동년 5월 5일 개교식을 가졌으며, 이보다 한 해 앞선 1909년 10월 천주교 성당에서는 선교의 목적으로 사립신성여학교가 설립을 보게 되었다.
 濟農의 탄생은 1909년 12월 22일인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 침탈하기 수개월 전으로 당시 제주군수인 이재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현직 군수로서 교장서리를 겸직하여 사립의신학교의 시설과 학생을 인수하여 공립제주농업학교를 개설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0년 4월 1일 학칙변경에 의해 3년제에서 5년제로 승격되었고 농과, 축산과 등 전공이 분리되자 오현단 학교부지가 협소해서 1940년 5월 26일 광양지역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학교를 이설하게 되었다. 이 당시 제농의 학교부지는 현재의 삼성초등학교 · 제주시교육청 · 평생지역학습관이 있는 근처로부터 서광로 남쪽일대에 이르는 6만여평의 부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제주농업학교는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도내 항일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류전교유(柳田敎諭) 배척운동 · 교장관사 습격사건 ·  제농독서회 사건 · 독립만세 사건 등 모두가 제농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었다. 이러한 제농의 항일운동은 민족혼을 일깨우고 광주학생운동과 3.1운동이 불씨가 되어 민족광복과 해방을 맞이하는데 기여한 바가 대단히 컸다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제주농업학교는 1945년 8월15일 해방과 이어 1946년 9월1일 학칙변경으로 수업년한 6년제 12학급인 당시 제주도내 최고인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학교 교명도 제주공립농업학교에서 제주공립농업중학교로 개명하고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의 일대 전환을 통하여 교육의 양적팽창을 하게 되는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교육체제가 민주적 방향으로 정비되기 시작했고 교육과정도 기존의 획일적인 주입식교수방법을 지양하고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키워주며, 교사중심의 수업에서 학생의 경험과 활동을 존중하는 학습방법이 도입되었다.
 제주공립농업중학교는 1950년 5월 20일 제주농업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가 이듬해인 1951년 8월 31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제주농업고등학교 9학급과 제주제일중학교 12학급으로 분리하게 됨으로써 도내 고등학교 교육의 시발점이 된다.

강   선   종 (기획실장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