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 앞에 존재하는 그림'
“자연은 반드시 처음에는 화가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에는 약이 된다. 아주 깊은 곳에서 성실한 화가와 자연은 악수한다. 확실히 자연은 거머잡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꼭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단단한 손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이다.
이 말이 지금은 화가 김재호의 여정(旅程)과도 같이 느껴짐은 웬 일일까. 그는 확실히 아주 깊은 곳에서 자연과 악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는 ‘성실한 화갗다.
깊은 곳에서 자연과 악수
사실 자연은 변화한다. 그 변화는 견줄 데가 없다. 사시사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고, 하루 동안에도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꾸는 것이 자연이다. 그런,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얼굴을 달리하는 자연이야말로 화가들에게는 영원한 표현의 대상이요 창조적인 욕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김재호는 이런 제주의 자연을 그리는 사람이다. 화북, 삼양, 하귀, 금능, 산방산, 일출봉, 서귀포, 중산간, 해안도로 등등 제주 섬 곳곳이 그의 발이 닫지 않는 데가 없으며, 돌담길, 유채꽃, 벚꽃, 스레트 집, 억새, 산, 바다, 포구, 눈 쌓인 숲 등 그의 화폭에 담긴 소재 역시 그만큼 다양하다.(김재호 서양화 개인전, 13∼19일, 제주도문예회관)
인물과 정물도 그리지만 그의 주 관심사는 아무래도 풍경이다. 그는 같은 풍경이라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명쾌하게 담아낸다. 예를 들면, 빨갛고 파란 스레트 집과 노란 유채꽃에 대비되는 검은 돌담과 투명한 남빛 바다가 어우러진 금능리 풍경에서는 제주 어촌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그리되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구성하고 현실의 색보다 강조된 색채를 선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시각적인 긴장감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제주 섬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최대한 연출하고 있다.
그는 주로 현장 스케치를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세잔이 야외로 스케치를 나가면서 “모티브로 간다”고 했듯이, 그에게도 자연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움직이는 동인(動因)으로서의 모티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바래지고, 때로는 주의 깊게 지켜보던 주변의 사물, 또는 자연의 풍경들은 그 절실한 목표에 의해 그 의미를 깊게 넣는다.
그런데 자연은 본래 무질서한 넓이가 있다고 하는 어느 철학자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의 그림들은 자연에 하나의 통합을 부여하면서 자연 그 자체보다도 더욱 더 작고 좁은 화면에 모습을 그려 넣어 그 위에 자연다운 외모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사람이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고 하니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받은 것은 8∼9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이 못지 않다. 그림에 있어서 나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색채 언어화된 빛을 확산
가령 일요화가로서 소박파(素朴派)의 대표적 인물인 루소는 세관의 하급직 관리로 있다가 49세가 되던 해에야 비로소 그림을 시작했고, 저 유명한 폴 고갱도 40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그가 이제 그림을 시작했다고 해서 결코 늦은 것은 아닐 터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들은 인상파 회화들처럼 빛을 색채로 포착하는 것을 매개로 하여 자유로운 비전을 실현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자연에 함몰되어 행복감이 넘쳐흐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에게서 자연은 광대한 테두리로서 이해되는 세계가 아니라 색채 언어화된 빛을 통하여, 즉 눈을 매개로 하여 느낄 수 있는 자연인 것이다.
그림은 무엇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또 그림에서 무엇을 배우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림은 보는 사람 앞에 존재해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김재호라는 화가가 앞으로 명심해야 할 것도 ‘보는 사람 앞에 존재하는 그림’이라는 명제가 아닐까.
김 원 민 ( 편집국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