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정체성
제주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제자유도시’가 거론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이 훼손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의심은 더욱 짙어만 간다.
과연 우리에게 ‘제주적인 것’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신화이자 환상일 뿐인가. 이러한 질문은 하나같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자존심만 난무할 뿐, 당당히 내세울 자긍심이 없다. 그나마 있다면 ‘제주에 산다’는 감정적 연대 정도일까.
정체성은 주체의 ‘자기 의식’이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집합이다. ‘제주사람’이 자신을 하나의 동일한 ‘제주사람’으로 인지하게 되는 공통감각이다.
나는 그것을 우리의 고유사상에서 찾는다. 같은 풍토적.역사적 환경 속에서 집단 생활을 영위해 오는 동안 저절로 형성된 공통의 사고방식이 내가 찾고자 하는 정체성이다. 우리들만이 갖는 독특함이 바로 고유성이라면, 결국 ‘제주의 정체성’이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우리의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제주사람’
그러나 ‘우리의 것’이 어떤 것인가는 어렵다. 나는 우선 현재 우리 고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함께, 과거의 역사적 현상도 똑같은 비중으로 주목한다. ‘제주사람’을 한낱 감정적인 자기 완결체로 치부하여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특정한 생활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일정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제주사람’을 제대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제주의 자연과의 연계성을 강조한다. 제주라는 자연과 ‘제주사람’의 ‘전체적 연관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의 ‘전제’는 제주의 하늘과 땅, 그리고 동.식물을 비롯하여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자연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죽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우리 고장이 있게 한 자연적 진화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종(種)들의 사회적 연대는 분리되지 않는다.
사회적 진화는 실질적으로 자연 진화가 인간적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할 때 정체성의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명하다. 우리의 정체성은 제주라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징체계이다. 따라서 제주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서 살고 있는 ‘제주사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해없기 바란다. 정체성을 거론한다고 하여 공연히 편을 가르자는 것은 아니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제주에서 생활하고… 그것은 진부하다. 거기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다보면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듣기 알맞다. ‘배타적’이라는 말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정체성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정체성과 외래문화의 수용
정체성은 미(美)와 격(格)을 갖춰 ‘창의성’으로 발전하게 될 때 의미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힘이 모자라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이 확고하고, 그리하여 모든 문제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그것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나쁜 것을 걸려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외래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것을 ‘우리의 양식’에 담아내는 것도 그 한 방법일 수 있다.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제주의 구성원 각자가 ‘제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