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여인', 그 눈물의 미학

2005-12-06     제주타임스

피카소의 그림에 ‘우는 여인’이란 작품이 있다. 스페인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태동한 그림이다.
그 그림은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입체파적인 기법으로 표현되었는데,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추상적으로 나타낸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듯이 표현함으로써 슬픔을 극대화하고 있다. 더 이상의 눈물은 없는 듯이 보인다

‘죽어도 아니 눈물…’

이‘우는 여인’처럼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눈물이 있다. 김소월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절규했지만, 눈물은 슬퍼서도 흘리고 괴로워서도 흘리며 기쁨이 넘치거나 감격에 겨워서도 흘린다. 그 가운데서도 슬프고 괴로워서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눈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 아니라 한 나라의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정치에 있다. 정치는 백성들을 눈물 나게 만들기도 하고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적(的)’ 상황은 정치가 잘못되어 벌어진 것이고, 그래서 ‘우는 여인’은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대변(代辯)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곧잘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캄를 펴겠노라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의 원조는 인도의 간디다. 그가 비폭력, 비협력주의의 반영(反英) 인도 독립투쟁을 주도하면서 “모든 사람의 눈으로부터, 온갖 눈물을 닦아 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모든 사람의 눈으로부터 온갖 눈물을 닦아 내겠다던 그의 이상은 곧 박애정신으로, 그는 “박애를 실천하는 데는 최대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전쟁과 폭력, 재난과 가난으로, 혹은 질병이나 사업 실패로, 그리고 실직이나 구직문제 등등의 이유로 숱한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온갖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고 싶다는 간디의 이상은 시대가 많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전 인류의 비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는 ‘좋은 정캄만큼 좋은 특효약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이 나라 정치인들의 약속은 한낱 말장난에 그치기 일쑤이다.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정치 그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국민들로부터 피눈물을 짜내는 원인 제공자로 둔갑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참으로 국민된 사람의 신세가 참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악어의 눈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지 모른다.

생각해 보라. IMF 때보다 더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도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위정자의 말은 서민들에게 얼마나 삶의 의욕을 빼앗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행적이고 시대 역행적인 광기로 가득 찬 대중 영합적 정치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으니 국민들 눈에서 어찌 눈물이 마를 날이 있을까.

6?5는 북한의 통일전쟁이며, 그 때 전쟁만 승리했어도 나라가 통일될 수 있었다고 외치는 사람이 백주에 활개치고, 무슨 양심수라는 사람들은 북으로 보내면서도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나 납북어부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가 또한 국민들의 눈물을 짜낸다.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대통령도 얼마 전 한 방송 프로그램의 논란과 관련해 “관용을 모르는 우리 사회의 모습”,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주의”, “저항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적 공포” 등의 용어를 쓰며 사회 현상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 같은 현상이 방송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게된 원인을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포퓰리즘 정치의 산물이 아니던가.

돈 앞에 양심을 팔고 권력이나 지위 앞에 인격과 지조를 헌 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인이 난무하는 부패와 타락의 시대에 모든 사람의 눈으로부터 온갖 눈물을 닦아 줄 진정한 정치인은 찾기 어렵다. 괴테는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은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 맛을 모른다’고 갈파했다. 정녕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본 정치인은 없는가.

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먼 데 있지 않다. 폭정에 시달려 ‘튀어나오도록’ 눈물을 쏟아내는 ‘우는 여인’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공자는 일찍이 “정(政)은 정(正)이다”라고 가르쳤거니와 그의 말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 원 민
   편집국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