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크리스마스 캐럴
사랑이 있어 더욱 살고 싶은 세상
‘네가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싶은 세상에서
이젠 나도
더 이상 너를 배반하지 않겠다’
몸과 마음에 감기어 드는 싸늘한 한기(寒氣)때문인가.
시(詩)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수녀 시인 이해인의 ‘시에게’를 읽는 나의 시적사유(詩的思惟)는 시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가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 싶은 세상에서’, 내각 생각하는 ‘네’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그래 그래, 12월이었다. 그것은 시린 마음들을 데우고 팍팍하고 차가운 인심을 녹이는 따뜻한 온정의 꽃이었다.
작지만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참 사랑의 의미였다.
그런 사랑이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 싶은 세상, 그런 사랑들이 모여 서로 배반하지 않고 아끼며 꽃처럼 아름답게 가꾸는 세상.
수녀께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의 시적 사유의 한계는 이처럼 작위적(作爲的)이었다.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의 ‘사랑의 채감온도 탑 제막식’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세군 자선 남비나 각 언론사의 이웃사랑 캠페인을 보면서 ‘따뜻한 이웃사랑이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 싶은 세상’을 그려보고 싶은 것이었다.
측은한 마음가짐이 사랑의 시작
일찍이 맹자(孟子)는 ‘사랑의 시작은 측은한 마음가짐(惻隱之心 仁之端也)’이라 했다. 어려운 이웃들을 가엽게 여겨 돌보는 마음이다.
이는 가진가가 위에서 베푸는 시혜(施惠)가 아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기다.
성경에도 “남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했다. 지어낸 위선(僞善)은 사랑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불경에도 삼륜청정(三輪淸淨)을 자선의 3요소로 삼았다. 내가 베푸니 네가 감사해야 한다는 맑지 못한 마음, 베풀면서 거래하려는 마음, 나에게 쓸모가 없어 버려야 될 것으로 베푸는 깨끗하지 않는 마음으로 행해지는 보시(布施)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성경의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마지못해 하는 생색내기용 이웃돕기나 언론에 이름 또는 얼굴을 내 보내기 위한 자기과시 형 온정이 ‘따뜻한 사랑의 감동’으로 포장되는 현실은 그래서 쑥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절망의 시대에 함께 나누는 행복
그러나 어찌하랴. 설령 그렇더라도 가진 것을 나누는 온정행사를 탓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비록 작위적이든 위선이든, 어려운 이들의 냉가슴을 녹이는 불씨가 되고 화롯불이 된다면 그래도 세상은 좀더 따뜻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받은 상금전액을 기부하면서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헤밍웨이의 말대로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주는 행복을 모르기 때문일 터다.
2005년 12월은 유난히 춥고 심신이 고단하고 고달프다.
절망적인 민생, 빈부 양극화, 이념갈등과 바른 정치의 실종 등 등 어느곳을 돌아봐도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절망의 계절에 그래도 온기를 느낄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이웃돕기 캠페인이다.
그런 사랑이 뜨거운 ‘크리스마스 캐럴’이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질 때, 그래서 그것이 뜨거운 열망으로 자라나서, 그런 사랑의 열매가 있음으로 하여 더욱 살고 싶은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