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제주도 목마장의 변천(7) 조선시대 목마장ㆍ산마장은 마을공동목장ㆍ군ㆍ사유지로 분할
제주마, 군수물자ㆍ갱냉작업ㆍ어린이승마용으로 활용-개량 실패
■ 근대ㆍ현대목장
일제강점기와 마을공동목장(1910~1945)
일본강제침략에 의해 조선시대의 목마장인 10소장과 산마장은 조직관리가 붕괴되어 1919년(大正 8)부터 목마장용지를 군유지 또는 마을단위공동목장조합이 구성되어 분할 등재 되어 갔다.
이들 마을단위 별로 공동목장은 각 읍·면을 통합할 수 있는 목장연합회가 조직 운영되면서 목장 내 급수장설치(현재 장전리공동목장:괴물오름 동쪽에 시멘트로 된 물 저수장), 잣성의 보수 및 축장, 목초재배, 진드기 구제, 화입(火入) 등 마을공동목장조합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마을단위목장용지는 1919년 7월 애월면 5소장의 89정(町)이 3사람이름으로 등재 되었으나 1937년 공동목장용지로, 1919년 7월에 구좌면으로 등재된 곳이 1937년에는 북제주군유지로 변경되어 현재 마을공동목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1919년 7월 94정(町)이 105사람이름으로 등재되었으나 1985년부터 마을공동목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전체 마을공동목장은 116개이며 면적은 3만2290정보였다.
남원읍과 서귀포시의 목마장인 9소장과 녹산장인 경우 하효공동목장, 신례공동목장, 위미공동목장, 남원·한남공동목장, 의귀공동목장, 수망공동목장, 태흥공동목장, 신흥공동목장, 토산공동목장, 가시공동목장 등(1920~1940년까지 대부분 등기됨) 과 사유지(私有地: 鹿山場인 경우 1,600町步가 金根蓍 소유였음) 등으로 분할하여 마·소(馬·牛) 등을 사육하였다.
일본강점기에 제주마에 대한 활발한 조사 및 연구결과 체격이 너무 왜소하며 개량의 기초축(基礎畜)으로 활용하기에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고 잡종생산을 위한 개량마(Thoroughbred, Anglo-Norman, 몽골마 등)를 사양관리 하는데 익숙지 않아 도입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또한 군사적 입장에서 조선사단(朝鮮師團)의 말은 조선내에서 사육하여 선발할 것을 고창(高唱)하면서 마산장려 지방을 함북·함남·강원·평북 등 국경방면이 좋다고 건의한 것 등 퇴보하는 제주마를 신종말로 개량하기 위해 몽골말 수입과 열세한 수말의 거세, 목초재배, 제주마의 활용 등에도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있다.
1938년부터는 말과 소의 도난방지와 번식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기위해 고유등록번호가 찍혀있는 금속을 귀에 이표(耳標)로 부착하고 우·마적(牛·馬籍)을 정리하였다.
마(馬)방목은 집단적으로 소와 함께 혼방으로부터 소속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귀를 자르는 이표(耳標)와 낙인(烙印) 등도 사용되고 있었다. 제주도의 馬産은 1927년에 제주마가 20,281필, 1940년에는 18,551필을 사육하였다. 그러고 일본은 제주마의 왜소성을 개량할 목적으로 개량종(Thoroughbred)을 도입하여 제주마와 교잡시켜 군마(軍馬)로 사용을 계획하였으나 교잡마들이 군마(軍馬)로 이용되지 못하고 대부분 제주마와 함께 군수물자 수송, 마차용, 농경용으로 이용되었다.
제주도에서 말과 소는 들풀과 목초가 중요한 사료가 되었는데 참새완두, 개자리, 참새피, 방동사니 등이 바닷가 마을과 여러 사람이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주된 것이며 산마을 보다 높은 곳에서는 등갈퀴나무, 새, 콩, 팥, 달맞이꽃, 비수리, 다불쑥, 제주조리대 등이 중요한 것이다. 보리와 피를 보통사료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고 사료를 삶아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구충(驅蟲)에 대해서는 관습적으로 음력 11월에 목장에 화입(火入)하는 정도이고 말은 거세(去勢)를 하지 않으므로 열세한 수말들과의 교잡으로 우수한 말들은 극히 소수였다고 한다.
또한 제주마는 군수 통조림용으로 일본에 수출되기도 하였으나 1945년 3월 제주마를 군수물자 수송용으로 강제로 징발하여 제주-목포간 수송도중 수송선 5척이 미국 전폭기의 포격에 의해 마필과 수송을 담당한 인원 모두가 희생되는 사고 후 마필의 수송은 중지되었고 8. 15광복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마 사육은 연중방목 방법을 다시 세 가지로 나누었다.
① 휴한지=말테우리가 낮에는 방목하고 날이 저물면 한 밭에 밤새 가두어 놓아 똥을 눕도록 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밭에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으로 말을 많이 갖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데 이것을 분전(糞田)방식이라 한다.
그러나 말이 적은 사람은 일정한 지역에서 봄부터 가을까지는 방목을 하고 가을 수확 후 밭으로 이동시켜 떨어진 이삭이나 짚들을 먹도록 하거나 촐(풀)을 베어 건조시킨 후 쌓았다(눌)가 이것을 먹였다.
② 수확 후의 평지=가장 널리 행해지고 있던 방식으로 해발 200~600m에 이르는 방목지에서 방목하면서 가족들이 교대로 감시하다가 농번기가 지나면 수시로 보러나가는 정도이나 겨울이 되면 휴한지로 몰아 사육하는 방식이다.
③전적으로 말을 방목해서 다만 때때로 망보러 나갈 뿐, 완전히 말의 자유에 맡기는 방식이다.
이것을 행하고 있는 마을에선 <말을 돌담 안에 가두면 죽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설적인 일면의 진리가 있다.
드물게 산 속, 특히 상잣보다 높이 방목되었던 말은 점점 산으로 올라가 겨울철 큰 눈이 오면 죽지만 늘 방목되어 있던 말은 도리어 산정 가까이에 올라가는 일 없이 가을이 되면 스스로 내려와 동사(凍死)하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반출된 제주마는 대판, 동경 유원지 등 여러 곳에서 어린이승마용, 탄광지대에서는 궤도마(軌道馬), 갱내작업용 그리고 온순한 성질이 높이 평가되어 교통이 불편한 지역의 교통기관으로써 벽지, 고지의 농사용, 운반용으로 활용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승용, 역용(役用), 밭밝기는 답압용(踏壓用), 말방아끌기 등 말 총 두수의 30%가 계절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마는 발, 발굽이 강하고 자갈투성이의 험한 길도 잘 걸으며 연일 비바람에 시달려도 병에 걸리는 일이 드물며 더욱이 갈증(渴症)에 견디는 힘은 다른 품종보다 뛰어나나 체고 103~120cm이므로 부담력은 일본말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연중방목으로 겨울철의 사료 부족과 관리미숙, 진드기피해에 의한 영양부족과 열성(劣性) 종마(種馬)와의 교배 등등이 열성을 조장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즉 휴한지나 목마장에서 관리자가 없이 종마선택이 없으므로 질적으로 떨어져 경제적 가치가 낮은 다수의 제주마를 사육하는 결과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우(韓牛)사육을 권장하면서 1928년 한림읍 옹포리에 통조림공장(株 竹中 製罐所)을 설립하여 도축장의 개선과 냉장장치설치를 하여 소와 돼지의 도축과 육류가공 공장에서 처리하였다. (도움자료=濟州島의 地理的硏究, 日本)
((33)현대목장에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