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게 된 두가지 경우
상대방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데 두 가지의 장벽이 있다. 그 하나는 언어적 장벽이고 다른 하나는 비언어적 장벽이다.
언어적 장벽
사오 백 년 전 서양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지같이 허름한 옷을 걸친 한 환자가 정신을 잃고 빈민 병원에 실려 와서는 의사들의 치료를 받고 의식을 회복했다. 그런데 그 병원의 의사들은 이 거지같이 보이는 사람을 가지고 의학적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 의사들은 환자 앞에서, 환자의 상태에 대한 얘기를, 환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라틴어로 대화를 했다. 두 의사가 그의 병실로 와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한 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이런 말을 라틴어로 했다. “이번 자네 실험에는 이 값싼 몸뚱어리를 쓰는 게 어떤가?” 이 말에 그 환자는 정신이 번쩍 들어 후닥닥 일어나서 병실을 뛰쳐나갔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 거지같은 환자는 16세기 고전주의자의 선두주자인 작가 마르크 앙토니 뮈레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라틴어의 대가였다. 혼자 이탈이아 여행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빈민병원으로 그를 실려 온 것인데 의사들은 그런 그를 알 턱이 없었다. 그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런 옷이 입기 편하다고 해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녔다. 그 때 이 후로 이 이야기는 21 세기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란셋, 1990년 9월 29일). 이건 또한 언어의 장벽이 진실을 파악하는 일을 가로 막을 수도 있다는 극적인 실례의 하나다.
비언어적 장벽
언어의 장벽 없이도 진실파악의 문제는 또한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위원장의 말을 하려 한다.
그는 1982년 서울대에 입학했고 그해 4월 지하이념서클에 가입했다. 그 후 그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毛澤東의 저작과 소련공산당에서 발간한 러시아 혁명사, 세계철학사 등을 탐독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북한 대남 혁명론을 학습하고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 사상에 대하여’,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후계자론‘ 등을 읽으며 주체사상을 학습했다. 그는 주체 철학의 학습을 통해 김정일을 무척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식민지론과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체계화 시켜가며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학생운동을 벌리고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도 했다. 미국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자는 강연을 해가면서, 주사파의 대부로 알려진 김영환을 만나 민혁당이라는 주사파 조직에 가입해 일하며 그리하여 몇 차례 투옥 되기도 하면서, 15년에 걸친 운동권 생활을 해갔다. 그러나 1999년 이후 그는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 지금 북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민혁당과의 관계에서 이런 말을 한다. “당시는 김영환의 1991년 밀입북과 김일성면담이나 민혁당이 북한과 연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지도선인 김영환을 정기적으로 만나 활동보고도 하고 조직의 방침을 듣고 학습도 진행했다.” 그리고 또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 그 김영환은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만나보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기대했던 체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북한과 거리두기를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19995년부터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세계에 알려지고 탈북자들이 대거 발생하면서 그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탈북자들이 말하는 정치범 수용소나 기아상태에 대해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아닌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부분 일관되고 일치한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생각을 바꾼 김영환과 합류해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주체사상이 어떤 결함을 지녔는지를 알기 위한 체계적인 연구와 이 시대 진정한 진보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180도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 그는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조직해 이끌고 있으며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일을 맡고 있다.
허 계 구 (상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