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으로 그어진 감정의 경계선
인간은 살면서 늘 한계를 느낀다. 넓게는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마감하는 운명적인 한계에서부터 좁게는 인간이 인간을 왜곡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 구속된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인간의 욕구가 여러 가지 현상과 부딪히면서 삶에 회의를 갖게 된다. 긍정을 하며 살아도 조금만 생각을 늦추면 안개에 쌓여있는 듯 삶은 불안하고 허무하고 위태로움마저 느껴 또 다시 무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권력을 지향하고 경제력을 다짐으로써 척박한 삶의 무기와 방패를 삼으려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간을 풍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병든 인간을 만들었다. 종교는 오히려 없는 지옥을 상기시키며 인간의 삶을 더욱 불안하고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이라는 어느 고대 철학자들의 비판도 있다. 황금의 손을 가진 미다스 왕은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성취했어도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지혜의 신에게 최고의 삶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 대답이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화려한 그림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빈 여백의 아름다움이 화려한 그림보다 우리에게 많을 말을 하듯 덧없음, 그러나 힘 있는 덧없음은 희망의 기름으로 가슴 속에 등불을 켠다. 그래서 니체는 병들어 있는 몸을 만물과 공명하면서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어차피 주어진 삶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앎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기를 바랐었는지도 모른다.
태고의 순수했던 대지는 먹고 먹히는 동물의 배설물에 겹겹이 쌓여 지층화 되었고 사람들이 편히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으로 변했다.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풍요에 오히려 가위눌림을 느끼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빈곤과 상대적인 빈곤 속에 상실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이 된다.
이렇듯 힘든 삶 속에서도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데카르트 이래 사람들은 이분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감정 또한 좋은 감정 나쁜 감정으로 구분지어 놓고 자신을 좋은 감정 쪽으로 밀어 넣어야 옳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인간 불행의 근원은 그러한 경계를 그어놓고 어딘가에 자신을 잡아놓으려는데 있지는 않을까. 근원적으로 자신에게 깔려있는 감정들이 올라왔을 때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성의 힘으로 버무리고 아우를 때 자신의 균형적인 삶의 균형과 조화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날씨가 매일 좋으면 세상은 사막이 됩니다’ 란 말이 있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동안 비가 오지 않고 매일 날씨가 맑으면 만물이 생존할 수 있는가.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말라 부서지고 만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슬픔, 두려움,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슴이 젖은 후에 찾아온 기쁨이 더욱 가치가 있고 행복은 언제나 고통 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가.
우주의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듯이 인간 내면의 감정들로 서로 부딪히며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우리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된다. 다만 감정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 감정에 너무 몰입하지만 말자. 지나친 몰입은 이성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을 영실 코스로 등반하다 보면 아래가 시원히 펼쳐 보이는 절벽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푹신하게 자신을 받쳐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금방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싸늘한 공포가 자신을 덮친다.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순간이다. 순간적으로 공포심은 ‘위험해, 조심해’ 경고를 하며 손으로 바위를 꼭 잡게 한다. 그처럼 공포감은 공포감 자체를 심리적으로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감정이며 신호인 것이다. 단지 사람들은 그렇듯 밀려오는 공포심을 오히려 더 부풀리며 자신을 그 속에 말아 넣어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위험을 알리는 감성을 이성의 힘으로 인지하고 서로의 감정을 아우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감정의 특이성을 제대로 그때그때 잘 부릴 줄 아는 것은 지혜의 힘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애지(愛智)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철학적인 삶은 사는 사람들이다. 철학을 알기 위해 철학책을 뒤져도 그 속에 철학은 없다. 철학의 본 모습은 ‘지식’이 아니라 매번 처한 상황마다 그때그때 옷을 갈아입는 ‘지혜’의 모습이지 않을까.
인간의 감정의 경계선은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다.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게 아니라 언제든 초월할 수 있는 신비감의 점선이다. 우리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점선에서 살고 있다.
오늘은 창문을 활짝 열고 햇살을 받아들이자. 엄연한 현실의 창에 가끔 바람에 살랑거리는 레이스 커튼을 보며 살아있음을 느껴보자. 삶의 온도는 뜨겁지도 싸늘하지도 않으며 우리에게 아름답고 편안하게 다가오리라.
강 연 옥 (시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