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이면에 감춰진 오키나와의 아픔
첫 만남부터 태평양의 강한 햇살, 흑조(黑潮)의 검은 색과 산호초의 에메랄드 빛의 원색 대비로 시선을 유혹하는 섬, 오키나와 슈리성(首里城)이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동아시아 바다의 독자적인 해상왕국 류큐. 그 슈리성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귀엽고 아름답기만 하다. 예로부터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삼던 사람들에게 바다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만국보편(ecumenical)의 세계이다.
류큐왕국의 상징인 세상 모든 나라를 잇는 가교임을 알리는 만국진량의 종(萬國津梁の鍾)이나, “오는 손님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칸카이몽(歡喜門), “예를 지킨다”는 슈례이몽(守禮門)은 동아시아 바다의 질서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1816년 영국의 라이라호 함장 바지르홀이 남긴 ‘류큐탐험항해기’에 나폴레옹과 나눈 대화가 있다.
바지르홀이 류큐는 무기 없는 곳이라고 하자, 나폴레옹은 “정말 무기가 없단 말인가, 대포도, 소총도, 그래도 창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바지르홀이 “그들은 결코 전쟁을 해본 적 없이 평화 속에 살고 있다”고 하자, 정복욕에 불타오르던 나폴레옹은 “도대체 저 태양 아래 전쟁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여행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저마다 내면에 상흔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복당하고 파괴당한 주인공들을 만날 때, 더욱 그렇다. 그 때마다 승자의 시각으로 구성된 우리의 역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되묻게 된다.
류큐왕국의 상흔은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면서 부터이다. 이른바 류큐‘쇼분’(處分)이 그것이다.
‘류큐’에서 일본 ‘오키나와’로 바뀐 현실은 태평양 전쟁 당시 바둑에서 쓸모가 없어진 돌(廢石)들을 버리고 실리를 챙기는 사석(捨石)작전의 제물이 되고 만다.
슈리성 입구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호(壕)가 그 현장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미국의 공세에 맞서 오키나와를 전장터로 삼았다. 이 때 슈리성에 일본군 32군 사령부가 주둔하게 되고, ‘철(鐵)의 폭풍’으로 불리는 미군의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일본 천황을 위해 이유도 모른채 사지로 내몰린 12만명의 원주민, 그러나 그들이 영면에 채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오키나와는 미군정 하의 동아시아 전략기지가 되는 비운의 운명을 겪게 된다. 결국 현실의 거대한 모순 앞에 평화는 피의 제전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랑케 이후 독일 역사학의 최고 석학인 마이네케가 ‘독일의 파국’에서 “모든 역사는 곧 비극”이라 한다.
그는 역사의 본질은 가치와 무가치의 악마적인 긴밀한 결합’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역사에는 선과 악, 긍정의 원리와 부정의 원리, 혹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뒤섞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키나와에 주목하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로 구성된 역사에서 무엇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자신이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원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보편사로 단지 2차 세계대전의 참상만이 아니라 아직도 평화라는 수식어의 이면에 감추어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까지 들추어내야 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무기가 없는 평화의 섬, 그러나 오키나와가 베트남 전을 비롯하여 세계각지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병참기지기로 변해 버린 것은 비단 오키나와인의 아픔을 넘어 우리 세기의 아픔이다.
그래서 망각을 강요당한 역사의 주인공은 그 회환을 응어리로 앓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모든 분쟁과 갈등 앞에서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종소리인가를 묻고 물어야 한다. 그것은 알뜨르비행장은 물론, 4.3평화공원, 강정 해군기지라는 비극의 역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