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림로 삼나무 아픔서 희망을 보다
삼나무 수난보다 더한 사태 허다해
자연이 무너진 곳엔 생뚱맞은 건축물
고유성 사라지면 ‘제주섬’은 뭍의 변방
시민들 벌채 분노에 공사 일시 중단
여럿 목소리 내면 ‘제주다움’ 보존 가능
다른 생태계 파괴행위에도 행동 필요
최근 제주시 비자림로 삼나무들이 수난을 당했다. 현재 915그루의 삼나무가 베어졌다. 덩달아 ‘아름다운 길’ 경관 일부도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자리는 아스팔트 도로가 차지할 거며, 예전의 경관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제주는 이렇게 조금씩, 그러다 갑자기 크게 망가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제주 환경단체는 물론 전국적으로 비판 여론이 들끓자 공사는 일단 멈췄다. 하지만 이미 잘려나간 삼나무는 되살릴 수 없다. 공사 중단도 일시적일 뿐 여론이 수그러들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대규모 개발 공사가 언제나 그랬다.
비자림로 삼나무의 수난은 오늘날 제주 섬이 겪는 허다한 사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저울로 잴 순 없을지언정 그보다 더 한 사태는 이미 수두룩하게 벌어졌다. 오늘도 제주 섬 여기저기서 현재진행형이다. 곶자왈이 지워지고 뱅듸(버덩)가 사라지고, 바다가 메워지는 대규모 사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져도 아무 일 없었다. 심지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성산읍 신산·온평리 일대가 150만 평 제2공항 건설로 무너진다 해도, 지켜 볼 뿐 별 일 없이 돌아가는 현실이다.
일련의 사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화 되고 있다. 개발 규모는 날로 더욱 커지고, 속도 또한 더욱 빨라진다. 자연이 무너진 곳에는 낯설고 생뚱맞은 것들이 들어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개발자본의 전략은 치밀하고 효율적인지라, 오늘날 제주는 연간 1000만 관광객이 북적이는 ‘관광지’가 됐다.
이리 보면 최근의 삼나무 수난은 필연적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관광지를 찾으려면 빨리 달려야 한다. 빨리 달리려면 길이 넓어야 하는데, 빼곡하게 들어선 삼나무는 거추장스럽다. 그까짓 삼나무 몇 천 그루 베어낸들 어떠냐는 게 제주도청 고관대작들의 생각이었을 거다. 하긴 그보다 더 한 자연파괴에도 별 일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때마침 제주에서 첫 번째 국제 녹색 섬 서밋 포럼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국의 하와이를 비롯해 일본 오키나와, 중국 하이난성 등 대표들이 참가해 ‘지속가능한 섬의 미래’를 논했다는 것. 폐회에 앞서 채택했다는 공동선언문의 핵심 키워드는 섬들의 환경자산 보전. 아울러 생태계 보전과 탄소배출량 감축 등도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 지역은 이미 상당 부분 섬만의 고유성을 잃은 터인지라 공허한 수사(修辭)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선언문에 사족처럼 끼어든 홍보마케팅이란 낱말도 그렇다. 제주만 해도 난개발과 생태계 파괴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터. 무엇을 위한 홍보마케팅인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한반도 남쪽, 사람이 사는 500여 개 가운데 300여 개를 답사한 ‘섬 나그네’ 강제윤 시인은 섬이 뭍과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섬이 크든 작든 뭍과 연결되면 섬은 고유성을 잃고 뭍의 변두리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다리가 놓이면서 인천 소청도의 고유한 돌 너와집이 사라졌고, 연평도의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이 헐리는 등, 그가 걸으며 목도한 육지화 된 섬들의 몰락 사례는 수두룩하다.
강 시인은 제주 역시 마찬가지로 본다. 섬과 뭍이 연결되는 방식은 다리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빈번하게 오가는 선박이나 비행기를 통해서도 섬과 뭍은 이어진다. 제주처럼 불과 몇 분마다 여객기가 뜨고 내리는 상황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제주 섬은 이미 뭍의 변방이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곳곳에서 섬만의 고유성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반면, 정체불명의 짝퉁 디즈니랜드형 관광상품과 건축물들이 판치는 현실을 보면, 강 시인의 지적은 핵심을 짚었다고 본다.
이렇듯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볼만한 것은 비자림로 삼나무 때문이다. 나무를 베어낸 자들을 향한 분노는 이례적으로 공사의 일시 중단을 이끌어 냈다. 이렇듯 여럿이 함께 제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제주는 제주다움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쓰러진 삼나무를 여럿이 안타까워 한 것처럼, 제주 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과 생태계 파괴에 대해서도 여럿이 분노하고 행동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