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사(鄕賢祠)의 문은 언제 열리려나?

2018-08-26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고득종·김진용 선생 모신 사당
공적 기려 제주성지내 2007년 복원
내부 미공개 선인향취 느낄 기회 막아

개방·소통의 시대 ‘닫힌 행정’의 일면
시민 불편함 덜겠다는 신임 행정시장들
숨겨진 사람들 마음 읽으려는 의지 필요

 

제주성지에 복원된 향현사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향현사의 문은 닫혀 있었다. 자그마한 사당에 세 개의 문이 설치되고, 문마다 자물쇠를 꼭꼭 채웠다.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 선생과 한양에서의 벼슬 대신 제주에서의 훈학활동에 헌신한 김진용 선생을 모셨다는 향현사. 오늘도 두 분을 뵙지 못한 아쉬움으로 닫힌 문에서 닫힌 행정을 떠올렸다.

향현사가 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두 분의 초상화와 두 분이 남긴 유물들은 모조품이라도 전시되어 있겠지. 제단은 어떤 제기(祭器)로 어떻게 꾸몄을까? 두 분의 발자취를 보고 읽으며 시간여행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영곡 고득종(1388-1460) 선생은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선인들에게 1만석의 양곡과 100석의 소금을 보내게 하여 구휼했다지.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남방의 탁관(卓冠)으로 불렸다는 영곡. 목사집무처에 걸렸던 홍화각(弘化閣) 편액은 그의 작품으로 홍화각기와 더불어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지. 원본은 삼성혈에 보관 중이고. 특히 홍화각 현판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현판 중 가장 오랜 것이라지.”

“명도암 김진용(1605-1663) 선생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숙녕전 참봉에 천거되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지. 1679년(효종10) 이괴 목사에게 고득종의 집터인 오현단에 장수당 건립을 건의, 후학들을 가르치니 본도의 풍속과 교화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지. 그래서 훈학하며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그분의 호인 명도암으로 칭하게 되었다지.”

이렇듯 두 분은 고씨와 김씨 가문의 자랑을 넘어 우리 모두가 흠모해야 할 탐라선인들이다.

그러기에 철폐된 지 136년만인 2007년 3월,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지운 2층 정자를 허문 그 자리에 복원하였던 것이다.

향현사와 함께 복원된 장수당(藏修堂). 쉼없이 공부하여 심신을 갈고 닦는 교실이라는 의미의 장수당은, 김진용 선생이 건의하여 설립한 재실(齋室)이었다. 충암묘와 장수당이 갖추어졌으니, 제주에도 드디어 (귤림)서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항현사와 함께 장수당이 복원된 이 일대는 아주 오랜 기간 제주도 역사문화의 본류이자 중심지였다.

향현사는 처음 고득종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1843년(헌종 9년) 이원조 목사가 귤림서원 옆에 세웠었다. 이어 1849년(헌종15) (1831년부터 영혜사永惠祠에 배향하던) 김진용 선생을 장인식 목사가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 선생과 함께 모신 것이다. 하지만 1871년(고종8) 대원군의 서원사우(書院祠宇)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나마 제주 유생들이 두 분의 덕행과 공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오현단에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제향한 것은 다행이었다.

다음은 이원조 목사의 ‘탐라록(耽羅錄)의 상현사기(象賢祠記)’의 일부다. “제주의 귤림서원 곁에 사(祠)가 있는데, 선정된 목사들을 제사 지낸다. …. 이괴 목사는 처음으로 유교를 일으키고 장수당을 세워 배움을 깨우치게 하니 지금의 서원의 강당이 그것이다. 섬 풍속은 귀신을 숭배하고 명복을 얻고자 부처를 섬기어 귀신 사당과 절간이 온 지역에서 눈에 띄었는데, 병와 이형상이 불 질러서야 비로서 풍속이 바르게 되었다…. 이 고장 사람 참봉 김진용은 이괴 목사 당시 유주(柳州)의 조덕(조조와 유현덕)의 역할을 하여 추가로 받들어 아울러 제를 지내고 있다….”

향현사의 내부를 이번에도 보지 못해 걸음을 돌리다 어린시절 부르곤 했던 동요가 생각났다.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 개방의 시대이고 소통의 시대이다.

며칠 전 취임한 제주시와 서귀포시 두 분 시장은 시민의 다양한 소리를 경청하여 시민의 불편함을 덜어주겠다고 일성했다. 눈에 보이는 불편함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은 불편함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은 곳에 더 많이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라면 숨겨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해결하려는 의지와 슬기를 지니고 있으리라. 우리네 삶의 질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역사문화의 의식에 달려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