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엔날레 집담회 유감
4월24일 ‘성과와 전망’ 주제로 개최
정준모 전 학예실장 발언에 ‘이의’
전문가 수사 담겼으나 메시지 허약
비평 아닌 비판이 많았다고 투정도
언론의 ‘감시견’ 역할 간과
이런 비상식적 상황이 가장 큰 장벽
바야흐로 비엔날레 시즌이 도래한 건가. 겨우내 잠잠했던 제주비엔날레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시발점은 지난달 24일 열린 이른바 집담회. 주제는 ‘제주비엔날레의 성과와 전망’. 뭔 얘길 할까 궁금했지만 못 갔다. 아쉬웠지만 다행히도 일부 언론을 귀동냥했다.
언론들은 육지에서 온 발제자들의 말을 성실하게 중계했다. 다만, 언론의 속성상 맥락은 걷어내고 핵심적 내용만 전했다. 효율적인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일부 보도는 ‘균형’을 버리고 ‘소신’을 택한 것으로 비쳤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발언은 1600자를 웃돌았지만, 김영호 중앙대 교수 발언은 70자 안팎. 지면 부담 없는 인터넷신문이란 점까지 고려하면 이례적 일이다.
이런 상황이면 다른 토론자 목소리는 더욱 듣기 어렵다. 그렇다고 대놓고 배제할 수 없으니 이름과 직함을 일러주는 선에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특정 언론이 제주비엔날레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건 뭐랄 수 없다. 하지만 거창하게 ‘제주비엔날레, 그 미래를 위한 제안’이란 간판 내걸고 벌인 판에서 특정 발제만 돋보이게 키운 건 부적절해 보였다.
지면을 통해 접한 정 전 실장의 발제도 그렇다. 나름 전문가다운 권위를 빛나는 수사(修辭)에 담았지만 메시지는 허약했다.
그는 “제주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의견이나 비평 아닌 비판이 많았다”고 투정했다. 아울러 ‘비판’과 ‘비평’을 정의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속내는 알겠다만, 기실 하나마나한 얘기다.
오늘날 미디어를 포함한 거의 모든 공론(公論)의 장에서 의견과 비평, 비판이 서로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공중(公衆)에 이로우면 그 뿐이다. 다만, 그걸 꼼꼼하게 나누고 구분하는 수고는 그에 기대 밥과 명예를 취하는 전문가의 몫으로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기실 정 전 실장의 이런 식의 주장에는 전문가의 의견이나 비평은 거룩하지만, 구경꾼들의 비판은 시끄러울 뿐이라 보는 선민의식도 엿보인다. 비전문가인 필자 또한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적잖은 잡설을 쏟아낸 터, 비엔날레라는 우아한 영토를 더럽힌 잡상인이 돼버린 느낌이다. 정 전 실장의 주장대로라면 그가 존엄하게 여기는 비평 수준에 이르지 못하니 입을 닫았어야 하는 걸까.
정 전 실장은 비엔날레를 둘러싼 이른바 ‘여론 양상 분석’도 했다. 애는 썼겠다만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제주지역 언론 취재원 풀의 한계로 몇몇, 아니 3~4인의 의견이 확대재생산했다”고 ‘분석’ 결과를 내놨다.
고작해야 서너 명이 떠들어대 비엔날레에 흠집을 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닐 거라 본다. 아울러, 몇 명의 기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수도 있다는 언론의 속성을 모르는 바도 아닐 거다. 그런데도 이런 발언을 한 건 무슨 의도일까. 고작해야 서너 명이 떠들러 댄 것이 확대재생산 된 거니 무시해도 좋다는 걸까.
제주비엔날레를 둘러싼 거의 모든 ‘부정적 지적’은 비엔날레가 시작되기 전 과정과 절차를 두고 오갔다는 말도 그렇다. 정 전 실장은 이런 상황을 강원비엔날레와 견줬다. 지역의 기획자나 비평가·작가들이 호의적이었고, 지적보다는 장점을 강조했다는 것. 언론 역시 일체가 돼 성원을 보냈다고 전했다. 오랜 시간 언론에 몸 담아온 필자로서는 강원의 이런 상황이야말로 되레 걱정스럽다.
비엔날레라는 예술 잔치판은 관련 분야의 기획자·작가·비평가·학자들에게 있어 반가운 장이다. 적지 않은 공적 자금이 쏟아지면서 모처럼 예술적 기량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니 이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는 이들로서는 부정적 견해를 내놓기 어렵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찌 보면 ‘침묵의 카르텔’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이른바 ‘감시견(watchdog)’ 역할을 해야 한다.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비판이든 의견이든 비평이든 끊임없이 내놔야 한다. 설사 그게 우려나 기우일지라도 크게 열린 잔치가 제대로 잘 이뤄지도록 견제해야 한다.
언론의 그런 일련의 행위가 정 전 실장의 표현대로 ‘비상식적인 논리’거나 ‘상처를 준 것’으로 읽혔다면, 이런 비상식적 상황이야말로 다시 연다는 제주비엔날레 앞에 놓인 가장 큰 장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