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초등교육의 '길' 열려
당시 제주사회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정부, 2년제 '병설교육과' 개교 승인
제주대학 병설교육과
초등교원 양성에 있어 획기적인 대안이 나오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심각한 교원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범학교 이외에도 각종 고시와 임시교원 양성소를 통하여 교원의 자격을 부여하였던 것이 1955년도에 이르러 적체 현상이 나타나 교원의 수급계획에 문교부는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초등교원 양성기관이 축소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아울러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질적 향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사범계대학의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초등교원 양성기관이 질적 향상에 대해 논의하게 되자 당시 자문을 맡았던 죠지 피바디대학(George Peabody College)교수단의 가슬린(W.E, Goslin)단장은 4년제 사범대학을 주장하였던바 그것은 한마디로 미국 교육대학의 성립과정을 따르자는 것으로, 4년제 사범학교를 몇 년 동안 운영하다가 5년제로 연장하여 고등학교과정의 3년을 분리시키면 2년제 대학이 되므로 교육대학의 성장이 순조로울 것이며, 교원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건상 장기적 계획을 세워 서서히 진행시킬 수 있는 정책의 일관성을 보장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교육계 인사들은 사범학교를 2년제 대학으로 승격 시킬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교육특별위원회’에서도 이러한 여론을 문교부에 건의하게 되나 당시 국회 문교사회위원회는 교육대학 설치안을 예산부족과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폐기하고 말았다.
그 후 초등교원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민주당 정부에서는 1961년 2월 23일 교육대학 설치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국무원령 제12호로 “국립대학 설치령”을 개정하여 초등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광주에 기존의 중등교원 양성기관인 사범대학을 초등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으로 개편 발족하여 1961년 4월 1일에 개교하였다.
2년제 부산과 광주 사범대학이 시범적 운영이 성공적인데 힘입어 5·16혁명으로 집권하게 된 새 정부는 1961년 9월 1일 법률 제708호로 공포된 “교육에 관한 임시 특별법” 제6조에 의거 1962년 2월 17일 각령 제455호로 “국립학교 설치령” 이 제정 공포 되었다.
“교육 특별법” 제6조에는 ‘① 초등학교 교원의 양성을 위하여 교육대학을 둔다 ② 교육대학은 국립과 공립에 한하며, 그 수업연한은 2년으로 한다’로 되어 있고, 이 설치 근거에 의하여 1962년 3월 1일부터 부칙 2조,3조를 적용하여 부산, 광주의 2년제 사범대학은 교육대학으로, 해당 시·도에 국립대학교가 있는 시·도의 사범학교(서울, 대구, 공주, 전주)는 국립대학에 병설된 교육대학으로, 국립대학교가 없는 시·도의 사범학교(인천, 춘천, 청주)는 독립된 단과대학인 교육대학으로 2년제 교육대학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의 정부 방침인 1시·도 1개 교육대학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제외되었다.
그 이유로는 제주도의 경우 교육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적을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의 수가 적어 교원의 수요도 적게 되어 독립된 대학으로 운영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1961년도의 교육대학 설립계획에서 제주도가 제외됨으로써 초등교원 수급과 재교육에 지장이 있을 것을 걱정한 제주도 교육계에서는 교육대학 설립을 각계에 건의하게 되었다.
교육대학 설립의 당위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여론이 빗발치게 되자 제주도는 1961년 11월 1일 제주도지사 명의로 문교부장관에게 제주교육대학 설치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하게 된다.
건의내용은 제주도민의 빈곤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초등교원을 희망하는 본도 학생들이 육지부로 진학하기 어려운 점과, 제주도내 교육대학이 없을 경우 교원 희망 학생들이 타 시·도 교육대학으로 진학률이 낮을 것이며 이에 따라 타 지방 출신 교원들로 충원해야 되기 때문에 생활에 안정감을 가지고 교직생활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점, 현직교사의 재교육 문제 등에 있어서 피교육자의 교육비 부담가중 등의 내용으로 반드시 도내에 교육대학이 설치되어야 함을 내세웠다.
제주도와 제주도교육회는 그 후에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문교사회분과위원회 등 관계요로에 여러 차례 건의서를 제출하고 설립유치를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결실을 보게 되어 정부는 잠정조처로 제주도에 국립제주대학에 2년제 교육과를 병설시켜, 다른 시·도의 교육대학과 같이 1962년 3월 2일에 개교하도록 했다.
제주대학에 병설된 2년제 교육과는 1962년부터 1968년 10월까지 초등교원 양성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352명(남231, 여121)의 초등교원을 배출하게 된다.
제주대학 병설교육과에는 국어, 교육, 사회, 음악, 체육, 미술, 과학, 실업의 8개 연구반이 있었으며, 김문규, 서수현, 오홍종, 이동수, 김여칠, 오상철, 현한경, 최문상, 박상호, 송재춘, 오만수, 강상배, 김영호, 임홍선, 김선종 교수 등이 있었다.
제주대학 병설교육과는 1968년 10월 10일에 제주교육대학으로 분리됨으로써 전국유수의 교육대학처럼 독립된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출발하게 된다.
제주교육대학이 제주대학 병설교육과에서 분리되기까지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2년제 병설교육과는 초급대학 수준의 대학으로 출범하였으나 독립된 교육대학이 아니라 국립종합대학교에 병설되어 있어서 유능한 초등교원 양성을 단일 목적으로 하는 특수한 성격을 띤 목적대학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발휘함에 있어 교육적 행정적 문제가 많았다.
당시 문교부는 1962년 12월 31일 각령 제1333호로 국립학교설치령을 개정하여 1963년 3월 1일부터 종합대학교에 병설되었던 교육대학을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으나, 제주대학에만 그대로 병설교육과로 남겨두었다.
제주도에서는 1968년 5월 17일 ‘교육대학 분리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고문에 제주도지사, 제주대학장, 제주도교육위원회 교육감, 본도출신 국회의원, 위원장에 박경훈 초대도지사, 부위원장에 이홍림, 좌봉두, 김재봉으로 구성하였다.
추진위원회는 전도를 순회하면서 교육대학 분립취지에 동의하는 교육계인사, 지역사회 유지, 현직 교장단을 비롯 각계 2368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으며, 이 건의서를 박경훈 추진위원장이 문교부에 제출함과 동시에 지역출신 국회의원인 양정규, 현오봉 의원의 지원과 협조로 결실을 보게 되어 1968년 10월 10일 문교부로부터 분리승인을 받아내게 된다.
같은 해 10월 26일 도민의 열망과 숙원이 담긴 제주교육대학 개교식을 가짐으로서 제주지역사회에 초등교육교사양성 전문기관인 제주교육대학의 역사가 펼쳐진다.
개교와 더불어 제주교육대학은 독자적으로 폭넓고 심도 있는 학교운영으로 학생들을 위해 초등학교 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익힐 수 있는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고, 시설과 교수진의 보강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2년제 제주교육대학은 2세 교육을 담당할 초등교사의 심도 있는 교육이 필요성이 대두되어 4년제 교육대학교 출범하기 까지 1968년부터 1984년도까지 1378명(남473명, 여90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 재직 교수로서는 오홍종, 이동수, 오상철, 현한경, 송재춘, 오윤겸, 강상배, 김영호, 임홍선, 김선종, 허인옥, 성주현, 오경종, 김영용, 송상순, 현종익, 임용순 교수가 재직했었다.
역대 학장으로는 초대와 제2대 김문규 학장(1968년 10월 26일 취임)이 역임하였고 제3대와 제3대는 김태규 학장(1976년 11월 17일부터 1981년 3월 17일)이, 제5대는 오윤겸 학장(1981년 3월18일 취임)이 역임하였다.
강 선 종
(전 탐라대 교수·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