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총파업 ‘도화선’ 역할

고위관리 극우 인물 교체 후 ‘검거 바람’
도내 좌익진영 핵심 검거되며 궤멸 상태
수회 비밀회의 거쳐 경찰·서청 공격 결의

2018-03-07     김종광 기자

[편집자주] 혼란했던 해방공간 시기 국가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제주 4·3이 발생한지 올해 70주년이 됐다.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과 정명(正名)을 위해 4·3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3·1사건 처리 과정에서 미군정은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했다. 1947년 3월 31일 제주경찰감찰청장에 김영배를 임명하고, 4월 2일에는 군정장관을 스타우트 소령의 후임으로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으로 교체했다.

4월 10일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으로 극우 인물 유해진을 임명했다. 유해진 지사는 부임하면서 “나의 지향하는 바는 극우 극좌를 배제하고 중앙노선에 입각한 정치이념에서 우러난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군보고서에서도 '극우파'라고 표현될 정도였던 그는 재임 기간동안 오로지 정치적 반대파를 척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미군정의 이 같은 수뇌부 교체는 물갈이를 통해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제주도에서 진행된 내용을 볼 때 우익진영 강화로 볼 수 있다.

미군정은 관공서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해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됐다. 이때 철도경찰 245명을 모집해 제주도에 배치시킴으로써 4월말 제주도의 경찰 병력은 500명에 이르렀다. 서북청년회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른 것도 이후의 일이었다.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도지사 사임 후 제주민전 의장으로 추대된 박경훈을 비롯한 민전 간부 30여명을 구속했다.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주민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반대 이유는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는 것이었다.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이었다.

1948년 초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사건’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뤄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끌려간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3월 말 한림면 금릉리에서는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붙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뒤 총살됐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내 좌익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다가오는 5·10 단독선거를 4·3사건 결행의 주요 명분으로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