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타고 조정 향한 제주 최초의 여인

[종합예술로 만나는 의녀 김만덕] (중) 만덕 할망 이야기

2018-01-23     문정임 기자

폭풍으로 부모 잃고 기생집 부엌데기 어린시절
명석한 두뇌·기지·도전정신으로 거상으로 성장
기근 심해지자 전재산 털어 구휼미 관아에 기부
이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의 표본으로 존경·관심

18세기를 살았던 어느 제주여인의 삶이 이 시대가 원하는 위인의 표본으로,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다. 성장 과정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떤 사내보다 당차고 대범하게 운명을 개척한 여인. 명석한 두뇌와 기지로 부를 쌓고, 다시 전 재산을 배를 곯는 도민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은 이. 만덕 할망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편집자주>

“나의 마음 실은 바람아, 얼었던 내 심장을 녹여라, 두려웠고 불안했던 나의 길 열어라” (뮤지컬 ‘만덕’ 대사 중에서)

김만덕은 영조가 다스리던 18세기 초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서 중개상인 김응열과 어머니 고 씨 사이에서 2남1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응렬은 전라도 나주와 제주를 오가며 미역, 귤, 전복 등 제주의 특산물을 팔고 육지의 쌀을 사왔는데 만덕이 11세가 되던 해 나주에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사망했고, 이듬해 어머니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떴다.

부모가 죽고 외삼촌 집에서 연명하던 만덕은 나이든 기생 월중선(月中仙)에게서 성장하며 기적에 오른다. 그러나 기녀가 천시 받는 직업임을 알게 된 만덕은 20살 때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부득이 기적에 오르게 된 사정을 탄원해 양인(良人)으로 환원된다.

이후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의 특산물을 육지에서 들어오는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해 판매하기 시작한다. 만덕은 장사에 능했다. 많은 돈을 벌었다. 배를 만들어 육지와 미곡을 무역했고, 물가의 변동을 잘 파악해 이문을 남겼다.

만덕이 쉰을 넘어가던 무렵(1790~1794) 제주에 큰 흉년이 든다. 100여 년 만에 있을 정도의 큰 재변이라 할 만큼 참혹했다. 제주목사 심낙수는 2만 섬의 구휼미를 조정에 요청했고 정조는 5000섬의 쌀을 보냈지만 수송 선박 중 다섯 척이 침몰하고 만다. 이에 만덕은 전 재산을 내놓아 배를 마련하고 육지에서 500여 석의 쌀을 사들여 대부분을 구호 곡으로 쓰게 했다. 굶주려 죽어가던 무수한 도민들을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구원한 것이다. 

만덕의 선행은 조정에 까지 전해졌다. 정조는 소원을 물었고, 만덕은 바다를 건너 상경해 한양의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청했다. 그러자 정조는 ‘평민 여성은 대궐에 들어갈 수 없고, 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 한다’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 그녀에게 내의원 ‘차비대령 행수의녀’라는 임시 직책을 하사해 그녀가 무사히 한양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

만덕은 73세로 사망하기까지 일평생 검소하게 산 것으로 알려진다. 양아들의 기본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만덕 사망 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양자 김종주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 주기도 했다.

만덕의 묘비는 2007년 제주도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됐다. 제주도는 1976년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 경내에 기념관을 만들었고(현재는 김만덕기념관으로 자료 이전),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 일에 만덕제를 지내고 있다. 또 만덕상을 제정해 모범 여인에게 수상함으로써 만덕의 선행을 기리고 있다. 2010년에는 KBS 1TV에서 이미연, 고두심이 출연한 ‘거상 김만덕’ 드라마가 방영됨으로써 만덕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