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소로(Thoreau)가 제주에 전하는 말

2018-01-07     김은석 제주대학교 교수

문명 등지고 호숫가에 정착
인간과 자연의 ‘나눔과 사랑’ 강조
자연 대상 인간의 착취 ‘경고’

관광객 2000만 시대 짙어진 그늘
‘개발·환경의 양립’ 현란한 수사일 뿐
잘못된 고정관념 지금이라도…

 

문명을 등지고 “모든 자연은 나의 신부”라며 미국 메사추세츠의 월든(Walden) 호숫가에서 조그만 오두막집에 살았던 소로(Henry David Thoreau). 신랑·신부가 서로 사랑을 나누듯 인간과 자연도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한다는 그의 선언은 생태주의 운동의 복음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월든’은 더 많은 농작물 수확을 위해 잡초까지 없애버리는 무절제한 인간 욕망에 일침을 가한다. “잡초의 씨앗이 새들의 주식이라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도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농사가 잘되어 농부의 창고를 가득 채우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실 ‘잡초’라는 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쓸모없는 풀이란 없고, 모든 풀은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저 인간들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자연의 일부’를 그리 부를 뿐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돈이 된다면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이 불도저식 행동강령은 휴머니즘이라는 미명하에 산업혁명 이후 줄곧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토인비는 역사를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파악하면서 인류의 자연정복에 그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이 우주의 주(主)인가? 우리가 호흡하는 자연은 인간 마음대로 정복할 수 있는 객체인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무차별 착취, 약탈해 온 인간은 생태계의 암적 존재는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이 피부에 와 닿을 만큼 오늘날 자연 파괴의 심각성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각종 환경학회 보고서들은 현재 추세라면 인류문명은 100년 이내에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한다.

생태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경제 발전과 환경 보전의 양립을 위한 ‘지속 가능한 개발’이다. 그러나 이 둘은 과연 공존이 가능할까? 경제적 이윤추구와 이를 지탱하는 과학기술이 얼마만큼 환경보존을 품어 안을까?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개발을 통해 경제발전과 환경보존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의 환경위기가 모든 생명체의 존속을 위협할 만큼 총체적이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대망하던 관광객 2000만 시대의 유토피아는 날로 늘어나는 쓰레기와 숨 막히는 교통체증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마치 소로가 100여 년 전에 진단한 것처럼 황금기로 보이는 제주가 겉만 화려할 뿐 속은 텅 빈 도금(鍍金) 상태에 다를 바 없다.

한 언론에 따르면 원희룡 도지사는 지난해 말 서울에서 개최된 한 워크숍에서 제주의 ‘지속가능한 개발, 녹색경제, 스마트시티를 연결할 혁신 모델’로 CFI2030 정책을 발표한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차에 인공지능을 더한 융복합 모델인 인공지능형 전기자동차 충전 인프라 구축사업, 빅데이터 등과 시민의 참여가 주축이 되는 Bottom-up 접근방식을 비전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현란한 수사로만 비칠 뿐이다. 과학과 기술의 융합체인 사이버문명은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물질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 환경윤리란 사실상 없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환경문제로 기로에 선 ‘제주호(濟州號)’에 접근하는 진지함이지 말잔치가 아니다. 전기차와 같은 첨단 기술의 결과물로 제주의 생태문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제주의 자연환경은 도구로서의 의미 밖에 없다. 그 결과 지금 무너지는 중산간을 비롯한 환경정책은 부차적인 정책으로 밀리고 만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는 “이 불쌍한 족속의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흘러왔는지….인간은 눈이 있으되 보지 못했고 귀가 있으되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몰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로(Thoreau)의 이 말에 귀 기울이면 어떨까?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잘못된 고정관념은 지금이라도 버리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