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2005-10-10     제주타임스

자신의 색깔, 고유한 멋은 필요하다. 자신의 캐릭터는 자신의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주위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슬기이며 다양한 현대사회를 적응하는 키워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개성시대라고들 하니까, 개성적으로 되려고 애쓴다.
애쓰는 것 까지는 좋다. 그러나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도저히 이해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해서 남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것은 조금은 생각해 봐야하는 것만 같다.
물론 나는 나이도 많고 세련된 패션감각도 떨어지고 전위패션에 대한 전문적인 예술성을 몰라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대중성이 있고 대중들의 느낌을 기반으로 성숙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일부 사람들의 입고 다니는 의상을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구별이 안 되고 계절을 초월하고 아주 중고품 옷으로 보이며 헌 누더기 옷에다가  어떤 경우에는 과대 노출된 옷으로 거리를 누비는 이들을 가끔 본다.
어린이들의 교육에도 좋지 않고  보는 사람들의 느낌도, 나 같은 사람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를 주류적 패션 체계를 부정하는 팜패션, 히피패선, 펑크패선, 거리패선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의상에는 일반적인 유행에 앞서는 독창적이고 기묘한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초현실적으로 의상문화가 발전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입기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옷들을 입고 다닌다. 일부러 뒤집어 입은 듯 하거나 , 마무리를 하지 않아 실밥이 너덜거리고,  또 상의인지 하의인지 구별이 안 되는 옷들을 입고 다니고 있다.
가히 전통적인 의상문화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혁명적인 변화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성적인 문화’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개성이라기보다 기벽이고 이런 사람은 기인에 가깝다.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 이런 기형적인 개성은 어쩌면 이런 사람들을  파멸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기인 취급을 받거나 왕따로 몰일 수 있다. 우리가 KBS 프로그램에서 경남청학동 전통 마을 볼 때 우리와는 동떨어진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런 사람은 행동도 마찬가지다.

일례가 기억난다. 내가 속한 어떤 모임에서 안덕면 서광리를 가는데 서부관광도로를 타게 되었다.
각자 자가용으로 카풀해서 가는데 자기는 절대 시속 70Km을 초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도로는 시속 100Km정도는 달려야 되는 도로가 아닌가. 사고 날수도 있고 자기 때문에  교통이 침체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자기 개성이라고 떠든다. 모난 사람, 별난 사람, 약자나 여자에도 절대 양보 하지 않는 사람…
이건 개성이 아니라 아집이고 무지다. 가령 어떤 동아리에서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트로트 가요로 즐겁게 무드를 잡는데 유독 자기만 특별한 의상에 가곡을 부른다고 해서 이것은 개성의 아니다.
뭔가 남과 다른 것을 개성이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참석자 모두의 감상무드를 깨는 것이다. 남과 같이 트로트를 부르되 자신의 색깔, 톤, 음색, 철학, 가치관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감각, 나만의 교양, 자기다움 , 이것이 개성이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도자들의 캐릭터들은 이런 것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먼 과거의 이야기고 한 시대의 흘러간 문화역사의 자료일 뿐이지만 말이다. 방랑시인공초(空招)의 꽁초, 시인수주(樹州)의 술잔, 처칠수상의 담배, 맥아더 장군의 선글라스와 파이프,  성철스님의 누더기 옷,  중광의 걸레, 혁명시대의 박정희 장군의 선글라스…
한 시대의 이름과 격에 맞는 개성이고 캐릭터였다.
지금은 개성의 시대다. 무슨 일을 하던 개성이 있어야 밥을 먹는 시대이다. 이는 누구도 부인 못한다. 개성은 자기의 고유의 색깔을 내면서도 전체와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