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초등교육의 근간 마련
제주도민들, 중앙에 교육대학설치 강력히 요구
제주교육대학의 어제와 오늘
제2편: 사범학교 시절
도립 제주사범학교의 탄생
제주도는 나날이 늘어나는 취학아동의 증가에 대비한 교사의 질적 향상을 기해야겠다는 취지아래 타 시도와 같이 정규과정의 사범학교 설립을 간절히 바랬으나, 3년제 과정의 사범교육도 제재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1950년 4월 24일 대통령령 제331호에 의거 현존학교에 관한 처치령 제4조에 의해 “현존 공립사범학교는 1950년 4월 1일 현재로 교육법 제167조 제8항에 의한 국립사범학교로 인정 한다”라고 공포하여 전국 16개 사범학교가 전부 국립으로 개편되었으나 제주도만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김재봉 선생에 따르면 사범학교 설치 필요성을 부산 피난정부의 사범계 업무담당 鄭사무관과 3년제 사범학교 설치에 대해 협의했는데, 국가예산 지원이 곤란한 상황에서 우선 현행 1년제 교원양성소를 3년제 교원양성소로 개편 운영하고 1년후에 이를 3년제 사범학교로 개편하는 것이 좋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1951년 10월 2일에 동광양 기와공장 자리에서 3년제 교원양성소 1,2학년 신입생을 모집함으로써 사범학교 태동을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고 했다.
1951년 10월 20일 3년제 초등교원 양성소로 개편 운영하던 중 정규 사범학교로 개편 인가를 받기위해 1953년 3월 7일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교 당국자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범학교는 1953년 4월 1일에야 인가를 얻어 냈으며, 같은 해 3월 23일 졸업한 당시 2학년으로 입소했던 학생들은 사범학교 개교를 며칠 앞두고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4월 1일부로 인가된 도립 제주사범학교는 6학급 300명 정원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 가지 인가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도립초등교원양성소 각 학년 학생을 본교 전학년 학생으로 편입 시킬 것과, 校舍 1,000평 확보와 5개 교실을 건축하고 풍금3대를 년내 구입완료와 단계별 학급 편제로서 1953년도(3학급), 1954년도(4학급), 1955년도(5학급), 1956년도에 3개학년 6학급 완성학급이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53년 4월 1일 기존의 초등교원양성소는 도립 제주사범학교로 승격 제주읍 이도리 1759번지 기와공장터에서 개교하게 됨으로써 사범학교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사범학교의 교훈은 “眞理”이며, 교육목표로 ①도의심 앙양과 민주적 생활태도, ②과학적 합리생활 건설, ③체위향상 및 군사훈련의 철저, ④근검노작의 실천화, ⑤사도함양 및 지도적 인격양성 등을 정했다.
초대교장에 홍정표 선생이 취임하였고, 1954년 4월 16일에는 제2대 교장에 송정호 선생이 취임하여, 같은 해 6월 15일에는 사범학교 내에 6개월 과정의 부설강습과 설치를 인가받아 1학급(50명)을 모집함으로써 도내 초등교원의 수급에 따른 속성과의 양성을 도모하였다.
국립 제주사범학교
1954년 6월 26일에 학교 당국에서는 도립 제주사범학교를 국립으로 이관하기 위한 서류를 문교부에 제출한 후 1955년 4월 1일 학교시설의 완비와 발전을 위해 제주사범학교시설기성회(회장 고인도)가 조직되어 제주시 건입동 1077번지에 부지를 확보(건입동 리유지 2000평을 전격적으로 희사 받게 됨)하고 교사신축을 완성함으로써,문교부로부터 1956년 4월 1일에 국립으로의 이관 인가를 받아냈다.
이관 당시의 학급편제는 1학년 2학급(남자 56명, 여자24명, 계 80명), 2학년 1학급(남자 52명, 여자16명, 계 68명), 3학년 1학급 (남자 42명, 여자 8명, 계 50명), 강습과 1학급(남자 42명, 여자 8명, 계50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955년 2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780호 국립학교설치령 제4장 제21조(국립사범학교에 중학교를 병설할 수 있다.)에 의거 병설중학교 설치 인가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 설치목적에 따르면 “본교는 본도의 입지적 특수사정에 의하여 초등교원의 자급자족인 견지에서 인가학급 6학급을 영위하고 있으나 본도 초등교원 수요 상황은 남북 양 교육구를 합하여 학교수 84개교, 교원수 659명으로 매년 1할(60명 내외)정도의 양성이 적도임에 비추어 본과 3학급을 감하고 이에 대하여 남녀 공학제의 중학교를 병설하여 본교의 건전한 운영을 기하려 함” 이라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55년 4월 1일부로 3년제 3학급 규모의 병설 중학교가 인가되어 개교하였으나 1959년도부터는 학생모집을 중지하였다.
한편 이 당시 1950년대의 사범학교 교육내용 중 특징적인 것은 교육목표에 명시된 바와 같이 도의교육과 군사훈련의 강화에 있었다. 도의교육의 경우 6·25전쟁을 거치면서 무질서하게 해이된 청소년들의 도의심을 바로잡기 위한 정부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도의심회복을 강조하는 교육계 내지 문교부의 움직임으로서 1954년 4월 20일 문교부령 제35호로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사범학교, 대학교의 “교육과정 시간당 기준령” 이 그것이다.
이 기준령에 나타난 시간배당이 중요한 기준으로서 도의교육의 강화가 강조되었으며, 사범학교의 교육에 있어서 이를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군사훈련의 경우 학도호국단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학도호국단은 원래 학원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이미 전국적인 차원에서 1949년 3월 8일에 결성된 바 있었는데 6·25로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교내군사훈련제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국립사범학교는 196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에 대한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당면과제로 부각된 것이 초등교육의 자질 향상을 위한 초등교원 양성을 초급대학 수준에서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교육대학 승격문제에 직접 관여했던 문교부 文榮漢장학관에 따르면 당시 교육의 질적 향상은 교사의 질 향상에 있으므로 고등학교 수준의 사범학교로서는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었고, 더욱이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불과 18세의 나이로 초등학교 담당교사로 너무 연소하며, 판단력이나 사회적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 교육이라는 중대한 일을 맡긴다는 것은 과중한 부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이러한 사회적 여론에 따른 교육의 질적 향상책의 하나로써 제안된 것이 교육대학으로의 승격 개편에 대한 연구 검토를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교사양성제도에 대한 개선 움직임은 1954년 1월 13일 전국 사범학교 기관장 회의에서 사범학교 승격안을 채택하여 관계요로에 건의하게 된 것이 교육대학 설립의 유래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1955년 12월에 ‘교육특별심의회’가 구성되고 그 가운데 사범분과 위원회에서 2년제 초급대학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짐으로써 13차의 심의를 거쳐 1957년 6월에는 ‘교육 특별심의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업년한 2년제의 교육대학을 1道 1교육대학을 설립하여 초등교원을 양성한다는 개선안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문교부는 ‘교육대학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1960년 11월까지 2년제 교육대학 설치에 관한 시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문교정책에도 제주도는 제외되었다가 도민의 요구가 빗발치자 1962년 3월에야 국립제주대학에 2년제 교육과를 병설시켜 본 도에서도 초등교원양성대학이 탄생하게 된다.
국립제주사범학교는 1956학년도부터 1962학년도 말까지 8개년간 400여명의 초등교원을 배출하였으며, 당시 교사로는 김순용, 박영옥, 윤태호, 이동민, 홍성립, 현화진, 김인제, 김양희, 김봉준, 김기화, 송종부, 문홍구, 장주열, 고앵자, 황언택, 이봉준, 오상철, 장태언, 김인규, 고인환, 배영호, 오홍종 선생이 있었다.
강 선 종
(전 탐라대 교수·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