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벽화를 그리자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
이것은 옛 소련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외친 공산당 선전미술의 구호이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회자되는 ‘거리미술’이란 용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거리미술의 대표주자는 벽화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도시벽화운동은 유럽이나 일본으로 퍼져나가 자리를 잡았고, 우리 나라에서도 1980년대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돼 지난 20여 년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함께 해온 문화행위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도시벽화는 전문적인 화가가 그린 것으로부터 동네사람들이 그린 소박한 것,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즐겁게 그린 것 등 거리의 모퉁이에서, 또는 건물 벽면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다.
'거리를 붓으로 만들자'
멕시코의 벽화가 호세 클레멘토 오로즈코가 갈파한 벽화의 정의는 명쾌하다. “벽화는 가장 높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힘찬 양식의 그림이다. 또한 그것은 개인적인 이익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감추어 놓을 수도 없는 공평무사한 그림이다. 벽화는 민중을 위한 그림이요,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주시내에는 ‘변변한’ 거리 벽화가 없다. 여기서 ‘변변한’ 이란 단서는 작품성(?)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며, 순수회화와 비교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리의 벽화는 애초부터 조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중요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사회현상으로 파악돼야 하는 데, 제주시의 벽화들은 담장이나 공사장 가림막, 또는 도심지 곳곳의 전기변전 박스 등에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 아파트 등 건물외벽을 장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짜’ 도시벽화라 할 수 있는 ‘본격적’인 작업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주시내 거리 벽화는 ‘거리환경 개선’이나 ‘환경미화’ 차원에서 관 주도형으로 소규모로 이뤄지고 있을 뿐 도시환경과 도시민의 삶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틀의 공공미술로서의 벽화운동은 없다는 말이다.
사실 벽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매개하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것이되 모두의 것인 그 특성으로 인하여 공공의 만족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벽화는 딱딱하고 부자연스런 도시의 이미지를 대자연의 섭리와 질서에 맞게 구성하고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면서 잿빛 도시에 생기를 되찾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간단하게 벽화를 분류해 보면, 조지(粗地)벽화, 화장지(化粧地)벽화, 첨부(添附)벽화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지벽화는 벽면 위에 덧칠을 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직접 안료로 그린 것이며, 화장지벽화는 그림을 그릴 면에다 칠을 하고 그 위에 안료로 그리는 것이다. 또 첨부벽화는 말 그대로 그린 그림을 벽면에 붙이는 방법을 말한다.
도시 환경에의 청량제
그 방법이야 어떤 것을 선택하든 문제는 얼마나 주변 풍경과 호흡을 같이 하느냐에 달려 있다. 잘 하면 도시환경에 신선감을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겠지만 달리 보면 조잡하고 세련미가 없어 오히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비판에 맞닥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새삼 물어보자. 제주시내 거리에 벽화가 있기는 있는가. 진정한 도시벽화는 건물주인이나 동네사람들의 소박한 장식욕구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주도 아래 벽화운동을 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관 주도로 이끌어 나가면서 차츰 민간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어느 미술사학자는 거리의 미술은 대중들이 표현해낸 ‘개성’일 수 있으며, 작은 구심점일 수도 있기 때문에 도시벽화를 ‘축제의 부활’이라는 사회학적인 개념과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축제로서나 도시환경 개선을 위해서나 거리벽화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김 원 민 (상임논설위원ㆍ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