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초등교원의 요람 '잉태'
제주교육대학의 어제와 오늘
제1편 : 제주도 초등교육교사 양성기관의 효시
제주타임스는 기획특집으로 도내 각급학교의 개교역사와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을 살펴보고 해당학교 명예를 빛낸 졸업생들의 활약상을 소개함으로써 후학들에게 모교를 바로 알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동문들에게는 다시 한번 모교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게 하여 이를 계기로 동문들의 단합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제주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교육대학교의 설립배경과 역사를 살펴보고 동문들의 활약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주교육대학의 출범 연원은 1946년 7월 20일 ‘제주도 임시초등교원강습소’의 개소에서부터 시작된다.
임시초등교원강습소를 개소하게 된 동기는 당시 초등교육에 대한 제주사회의 열망과 갈증해소에 있었다.
제주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2세 교육을 책임질 올바른 교사를 어떻게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뇌했던 역사의식의 소산이자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결과였었다.
제주교육대학이 59년 동안 걸어온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제주지역사회에 초등교육자 양성 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음미하고, 지난날의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 해 봄으로써 도약의 계기를 삼고, 지역사회 동량을 키워 내며 초등교육 발전에 공헌할 교육자 양성기관으로서의 제주교육대학교 오늘의 현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 강습소'의 설립
8·15광복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일대 변환을 초래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소멸되었거나 사장될 뻔 했던 우리민족이 모든 역량과 잠재력이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과 더불어,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한 한 차원 높은 신세계로의 도약을 이뤄야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전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새로운 요소들이 해방과 더불어 구상되어지고 기하급수적으로 폭발된 민족적 에너지는 교육에 구심점이 집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교육의념의 계승이자 일제에서 해방된 제주도민의 교육에 대한 고양된 욕구와 염원이 창출되어 나타난 최초의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출발이었다.
민족광복의 기쁨 속에 나타난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는 해방 직후 혼란과 격동의 시련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2세교육의 담당자를 육성하는 양성기관으로서 모태가 되어 오늘의 제주교육대학교로 성장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의 출현 배경은 반세기에 걸쳤던 일본의 간섭과 통치가 끝남과 동시에 그 동안 억눌렸던 교육열의 폭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의 자주적 민족문화 건설사업이 교육의 개화로 나타난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의 억압에서 해방된 제주도민들은 해방과 더불어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각 마을 단위별로 그들 스스로 학교설립에 정열을 쏟았고, 이와 더불어 정부는 1946년 9월에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1947년)를 앞두고 교육적령 아동의 7할 이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전국 각처에 많은 수의 학교를 증설하였다.
제주도의 경우에도 1945년 8월 15일부터 1947년 12월 31일 까지 미군정 1년 반 동안에 44개교의 새로운 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담당해 나갈 교육행정가나 교육전문가는 물론 교육을 직접 담당할 초등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교육의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당시 제주도의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던 교원 수는 311명이었다.
그 중에서 그 중에서 일본인 교원이 67명(21.5%)이었는데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일본인 교사들이 일시 귀국으로 생긴 교사의 공백과 대다수 실설학교 설립으로 파생된 교사부족 현상은 심각한 교육문제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반면 제주도의 경우 당시 교사양성기관이 없었으며, 제주도의 행정권이 전라남도에 속해있어 전라남도의 교사양성기관인 광주사범학교에서 부족교원을 충당해야하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김문희(金汶熙) 島司署理는 학사행정을 관장하던 조천읍 출신 김달행(金達行) 장학사로 하여금 초등학교 부족교원을 충원하기 위해 1946년 7월 20일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를 설립, 3개월 과정의 단기 교육으로 교원을 양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초급 중학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지원자중에서 101명을 국어, 국사 , 상식으로 전형하여, 제주읍 삼도리 930번지 제주북초등학교의 동쪽 목조건물 강당 6학년 교실 중 3,4반 2개의 교실을 빌어 교원양성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본도 사범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 소장으로는 1946년 8월 1일 제주도가 전라남도의 예하기관에서 벗어나 道制로 행정기구가 승격되어 부임한 초대지사인 박경훈(朴景勳)씨가 겸임하였고 부소장에는 당시 총무국장인 김두현씨가 맡았다.
실무 책임교사로 김문규(金文奎)선생이 사무총괄은 송정호 학무과장이 담당하였다. 당시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에서 배출된 김옥찬 동문의 얘기에 의하면 초등교원 강습소의 수업은 고칠종, 송정호, 이관석, 김원중, 김달빈 등의 맡았으며, 교육실습은 북국민학교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 제주도 초등교원 양성소
1946년 11월 10일에 ‘제주도 임시 초등교원강습소’가 ‘제주도 초등교원 양성소’로 승격되고 수업년한은 1개년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초대 양성소장은 金斗鉉 도청총무국장이 겸직 발령되었고, 1947년 4월 10일 제주도지사로 새로 부임한 柳海辰지사는 같은 해 6월 14일자로 金文奎, 金在棒, 선생을 교사양성기관 운영을 위한 실무교육책임자로 위촉하였다.
당시 교원 양성기관인 강습소나 양성소는 제주도민의 뜨거운 교육열과 청년학도들의 향학열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미흡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교육의 의념조차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못했으며, 시설이 미비하거나 노후한 것이 태반이었고 교원이 양적 부족과 교재 및 실습기재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유능한 교수진의 확보란 단시일 내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마땅한 校舍도 없이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해야 되고 시설의 절대적 빈곤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본도 초등교육을 위해 선결해야하는 교원양성의 벅찬 임무를 수행하느라 안간 힘을 쏟았던 당시 교사와 교육관계자 청년학생들의 눈물겨운 노력이야말로 제주도 초등교육사에 있어서 커다란 귀감으로 남아 있다.
당시를 회고한 송정호 동문은 교실과 책상도 없이 흙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공부하던 시절을 이야기 하면서, “교원양성소는 제주북국민학교, 신성유치원, 측후소 별관, 일도리 향사 등 이동생활을 전전하게 되어 노두에서 방황하는 불우한 처지를 동정한 도내 교육자들은 초·중등학교 학생들을 총 동원하여 눈물겨운 노력으로써 많은 달걀을 모아 희사하여 주는 등 적극적인 성원과 협조덕택에 토막집이나마 간판을 걸고 공부하는 사도수련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했다.”
1950년을 전후한 대한민국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6·25전쟁의 돌발로 말미암아 국가의 존망이 일시에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무너지고 국민은 거리로 내쫓겨 피난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 국민이 겪어야 할 비운과 국가적 위기 속에서 청년학도들은 학업대신 전선에 투입됨으로서 제주도교원양성소에서도 구국전선에 나서게 됨으로서 70명이 입소자중 10명만이 남게 되기도 하였다.
그 이전에 제주도는 4·3사건이 일어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 30개교 이상의 국민학교가 소실되었고 상당수의 교사가 피살되는 등, 참담한 교육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교원양성에 있어서 실의와 공백기를 맞이했는데, 6·25전쟁의 여파가 더욱 어려움을 배가시켰던 것이다.
암울한 시대적 여건 속에서 교원양성교육은 이런 아픔을 딛고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데 전력하였지만 1년 과정의 교원양성교육으로는 그 소임을 다하기엔 벅찬 과업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나날이 늘어나는 취학아동의 증가와 교사의 질적 향상을 바라는 전도민의 염원 속에 제주도 초등교원양성소는 사범학교 태동의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해냈으며, 1951년 7월 17일 마지막 수료까지 5년간 총 573명의 초등교사를 양성하고 막을 내렸다.
각 회기별 모집정원은 교원 필요 수요에 따라 1회 50명, 2회 69명, 3회 93명, 4회 149명, 5회 70명, 6회 63명 이었다.
강 선 종
(전 탐라대 교수·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