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이렇게 논의 하자
요즘 제주사회를 뒤 흔드는 ‘사건’이라면 제주특별자치도 기본계획 속 ‘개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혹은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특별자치도의 계획에는 ‘고유한 자치권의 보장’ 등이 있지만 결국 외국자본의 유입을 비교적 제한 없이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특별자치도의 자치권의 확대 보장도 결국은 제주도민의 ‘소득 향상’으로 귀결 될 것이고 그 꼭대기에는 ‘외국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이라는 테마가 보이는듯, 보이지 않는 듯 숨어 있다.
개방반대를 놓고 혹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에 빗댄다. “특별자치도를 하면서 개방을 하지 않으면 19세기 전반 조선 말기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과 같다”. 일리 있다. 반대의 목소리 또한 타당성을 갖는다. “제주도민의 삶의 질 향상은커녕 오히려 소득의 양극화 등을 시킬 우려가 있다”.도청 앞에 쳐진 천막들은 개방반대에 대한 이들 단체의 절실함을 얘기해 주고 있다.
개방은 필수 불가결
제주특별자치도 추진과정의 하나인 외국자본 유치를 놓고 찬반론은 이처럼 가파르다. 제주특별자치도 계획을 추진 중인 제주도는,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국제자유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과 의료와 노동시장의 개방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수입개방 자유화로 이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고 있는 제주도민에겐 외국의 자본이 들어와 이곳저곳에 투자를 많이 해야 살길이 있다는 논리는 나름대로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란다. 현재의 개방계획으로는 “소득의 양극화로 인한 빈곤층의 확대라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고 반박한다.
특별자치도를 추진하든 안하든 이미 우리는 ‘개방’의 물살을 타고 있다. 흔한 예로, 우리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세계 어느 곳이든 접속을 해 그곳의 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개방화 시대의 조류를 읽어내고 여러 사정과 모습들을 만난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가 되돌아보는 흥선 대원군의 ‘척화비’는 케케묵은 ,역사의 뒤안길의 ‘고물’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 제주도농민들이 이마에 띠를 매고 그토록 반대했던 농수축산물의 개방은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중국산 고사리가 농약을 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고, 벨기에산 돼지고기가 방부제 처리를 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개방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경제적 예속화화 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그 물결은 거슬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방은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개방을 무조건적, 전면적 허용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개방을 하는 과정에서 절차의 합리성을 찾는 것은 물론, 제주도민들로서 가장 효율적 개방이 무엇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다.
효율적 개방을 모색해야
이에 대한 답은 새삼스럽게 찾을 필요 없이 이미 나와 있다. 김태환 지사가 이달 초 “특별자치도 위상에 걸 맞는 권한을 가져 온 후 개방수위와 시기를 조절하자는 것이 도의 방침이다”고 밝혔다. 양성언 제주도교육감도 최근 열린 도교육위원회 질문답변에서 “개방은 원칙적으로 찬성하나 시기는 늦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것이 개방에 대한 모범 답안일 수는 없지만, 현실에 부합한 답안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수장(首長)의 발언에는 개방을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이에 대해 불안과 불신을 드러내는 도민들의 입장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자치도에서 개방을 빼면 남는 것은 껍데기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적인 개방을 허용하는 것은 안된다. 무조건적인 개방을 반대하는 것 또한 능사가 아니다. 앞에서 몇 차례 얘기했지만 개방은 시대적 소임이다. 다만 개방을 하되 서서히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천막농성을 벌일 것이 아니라, 그 열정으로 여기에 매달려 볼 일이다. 그 정성으로 이것을 진실 되게 논의해 볼 일이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개방할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