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시인 김현승과 '제주'

2005-09-20     제주타임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 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과 같은 존재인 아버지를

노래한 고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는

매일 매일의 힘든 수고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면서

외로움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이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어린것들의 순수한 피’

즉 자식들의 올바른 성장과 순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현승은 ‘슬픈 아버지’라는 시에서는,

전후의 궁핍한 시대를 배경으로 ‘라이프’ 잡지에 실린 ‘외인부대의 깡통을 들고

노니는 굶주리는 허덕거리는 불행한 한국의 아이들’이

굳이 장난감 비행기, 탱크들을 갖고 노는 까닭이 무엇일까?

시인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는 이 작품에도

아버지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김현승이 유년시절을 제주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시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김현승을 제주문학사에 편입시켜,

어린 시절을 보낸 제주생활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구하는 일도 후배문인들의 몫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특히 기독교 목사인 그의 아버지 김창국이

제주에서 독립운동에 관계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역시! 라는 감탄사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

‘고독의 시인’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는

아버지가 신학을 공부하던 평양에서 1913년에 출생하고,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제주로 이주하여 6세까지,

제주의 자연과 더불어 식민지 유아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에서, 김현승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김창국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창국은 기미년 조선독립회생회의 항일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목사이다.

1918년 제주성내교회에서 전교활동에 힘쓰면서,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자

조봉호 전도사, 최정식, 김창언 등 신도들과 접촉,

독립회생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든다.

이들은 최정식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

3종의 문서를 각 50매씩 인쇄한 다음 제주도 각 면사무소에 배부한다.

그리고 4,450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한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7월에 6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김창국, 조봉호, 최정식, 이도종, 문창래, 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구속되었다.

 그는 1919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정사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6월을 선고받아

항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시인의 어린 시절과 그리고 그의 아버지 김창국 목사의 불타는 애국심이

우리 제주에서 꽃피웠다니, 그 역사적 장소 우리 제주가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김 관 후 (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