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모순과 청춘에 관한 이야기
전 언론인 서명숙씨, ‘영초언니’ 발간
다시 영초언니를 떠올린 건, 순전히 그 여자 최순실 때문이었다.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고 호송차에서 내려 특검조사를 받으러 가던 중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특검이 아니”라고 외쳤던 그녀. 순간 40여 년 전 호송차에서 내리며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고는 곧장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 막혀 발버둥 치던 한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그 여자는 내게 담배를 가르치고 사회 모순에 눈뜨게 했던 천영초. 영초언니였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에 제주 올레길 열풍을 일으킨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자전적 소설 ‘영초언니’를 펴냈다.
1970년대 말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대학생활을 하던 여대생 서명숙은 영초언니를 만나 사회 문제에 눈을 뜬다. 영초언니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 세대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실존인물 ‘천영초’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대학에 갓 입학한 1976년 봄, 교정은 분홍빛 진달래와 샛노란 개나리가 어우러져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두해가 지나고 1978년 봄, 교정에 핀 진달래는 더 이상 단순한 꽃이 아니게 된다.
저자가 영초언니를 만난 것은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해 대학신문기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언니와 함께 학생기자와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목격한 유신정권의 맨 얼굴은 그들의 삶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 특유의 집요하고도 유려한 글쓰기로 독재정권하 대학생들의 일상과 심리적 풍경을 섬세하게 복원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36일간 성동구치소에 구금됐던 기억을 털어놓으며 지금까지 민주화운동사에서 제대로 비춘 적 없었던 ‘운동권 여학생들의 투쟁사’를 조명했다. 억압의 시대, 청춘들에게 죄스럽게 다가갔던 사랑과 낭만, 방황, 그리고 달라진 시대. 책은 오늘날 지워지고 잊힌 그들을 향한 서명숙의 곡진한 ‘해원굿’이다. 289쪽, 1만3500원,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