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군인에 父는 산사람에”
기구한 ‘4·3 가족’의 운명
28일 북촌초서 4·3희생자 유족 김두연씨
1일 명예교사로 아이들과 그날의 이야기
형 이야기를 채 시작도 하기 전에 김두연씨(73)의 눈시울은 젖어들었다. 메모지를 든 굵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28일 북촌초등학교 강당에서 3~6학년 45명을 앞에 두고 그의 가족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가 걸음마를 떼고 막 말문을 열기 시작했을 때, 지금 우리가 4·3이라고 부르는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도 불어 닥쳤다.
1948년 음력 12월, 아버지는 당시 스물한 살이던 큰 형을 설득하고 있었다. “자수하면 살려준덴 햄쪄.” 산에 오가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가족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 몰살시키던 때였다. 형은 아버지의 말을 안 믿었지만, 자수했다. 거짓말이었다. 추운 겨울날 형은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한 2대대 군인에 의해 총살됐다. 그 광경을 아버지도 지켜보아야 했다. 이틀 후 아버지는 아무도 몰래 아들을 업고 인근 군유지에 마치 아이 묘처럼 얕게 형을 매장했다. 총살된 시체는 가져가서도 안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어느 날, 마을의 유지였던 아버지는 군인들의 토벌작전에 동원돼 업무 수행 후 귀가했다. 고사리 장마가 시작된 음력 3월. 산에 우비를 두고 온 게 뒤늦게 생각나 가지러 갔던 아버지는 산사람들에 잡혔고, 선흘리의 38m높이 수직 동굴에 버려졌다. 막내아들 김두연씨가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1985년. 유골을 수습하면서였다.
그렇게 큰 형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4형제는 69년을 살아왔다. 아장아장 걷던 막내아들은 머리가 하얗게 흰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 같은 아이들 앞에서 그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제주도교육청은 4·3을 앞두고 올해도 희생자 유족 29명을 84개교에 보낸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1일 명예교사의 자격으로 이날 아이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가슴 아픈 성장과 가족 이야기를 건네는 동시에 제주4·3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힘겨운 과정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마치 오래된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하다는 듯 김 씨를 깊이 응시했다. 고학년 아이들은 유적지 탐방 등을 통해 마을에서 벌어진 4·3의 광풍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70여년을 사이에 둔 김 씨와 아이들의 소통의 끈은 70분간 이어졌다.
6학년 장승준 군은 “4·3유족인 할머니를 통해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며 “우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희생자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