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번의 촛불 시민혁명,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
제주 작년 10월29일 시작 134일간 20차례
시민 5만6500명 ‘참 민주주의’ 위해 거리로
‘당신은 비가 오고 눈발이 휘날렸던 혹한의 시기에도 이 광장에 참석하여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함께 해주셨습니다. 당신이 보내주신 헌신과 노고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2017년 3월10일 제주촛불시민 일동.’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한 다음날인 11일 오후 제주시청 민원실 앞에서 열린 ‘20차 박근혜 탄핵 승리 제주도민 촛불집회’에서는 그동안 한결같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고생한 모든 촛불시민들에게 상장이 수여됐다. 지난해 10월29일 제주에서 처음 등장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된 다음날인 11일까지 꼬박 134일. 20번의 촛불집회, 연인원 5만6500여명이 든 촛불은 ‘비정상의 정상화’의 시작과 끝이었고,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 비정상, 촛불에 불붙이다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수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언론 보도 이후 토요일인 10월29일, 400여명의 시민들은 시청 어울림마당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이후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연이어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과 ‘정유라의 입시 부정’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1월5일 열린 2차 촛불집회에는 전보다 5배 많은 2000여명이 참여했다. 당시 <제주매일>과 만난 김경선(42‧여)씨는 함께 나온 두 자녀의 손을 꼭 잡고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 아닌 형편없는 일반인에 의해 국정농단이 이뤄진 게 화가 난다”며 “쓰러진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던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의 의원의 발언이 촛불에 기름을 부었다. 많은 시민들이 “촛불 모여 횃불 된다”며 거리로 나오자 5차 집회 때부터는 어울림마당보다 넓은 제주시청 종합민원실 앞 도로로 장소를 옮겼다. 이후 정치권의 공방으로 탄핵안 가결이 지지부진하고, 국정교과서 4‧3 왜곡 논란이 일자 12월3일 7차 집회에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제주 지역 최대 인파인 1만1000여명의 시민들이 “국민 믿고 탄핵하라”며 촛불을 들었다. 12월9일 국회는 의원 234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탄핵안을 가결했다.
■ 정상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헌재 결정을 가만히 지켜볼 법도 하지만, 시민들은 꾸준히 거리로 나왔다. 성탄 전야인 12월24일 10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조승택씨는 “우리가 위임해준 권력에 억눌리며 살지 않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끝까지 다함께 촛불을 들자”고 말했다. 2016년의 마지막 날 열린 ‘송박영신’(박 대통령을 보내고 새 대한민국을 맞는다) 집회에는 1500여명의 시민들이 ‘헌재의 즉각 탄핵’ 등을 외쳤다. 해가 바뀌어 처음 열린 12차 촛불집회에는 방송인 김제동과 시민들이 비를 맞으며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간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힘내자”고 말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헌법재판소 선고가 가까워지면서 촛불시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막말을 쏟아냈다. 김평우‧서석구 변호사는 헌재를 “국회 소추인단 대리인”이라며 우롱했고, 촛불을 “빨갱이”라며 폄훼했다. 2월26일에는 제주에서 첫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려 참가자들이 “종북좌파 몰아내자” “대한민국 헌법수호” 등을 외치기도 했다. 지난 4일 19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박근혜 없는 3월이 진정한 봄”이라며 헌재에 탄핵을 촉구했다. 그리고 헌재가 탄핵을 인용한 10일 진정한 봄이 촛불시민들에게 찾아왔다.
다음 날 ‘진짜 봄’에 열린 첫 촛불집회에서는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현고에 재학 중인 김지석군은 “일본군 위안부 졸속 합의로 할머니들 권익을 해쳤고, 이 사건을 기억하려는 소녀상마저 치우려고 한다”며 “12‧28 합의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했다. 농민 김옥임씨도 “백남기 농민은 우리 농업을 지키려다 경찰 물대포에 맞아 운명했다”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 이종철씨도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세월호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촛불 혁명, 당신이 역사의 주인공 20차례에 걸친 촛불집회에서는 전국에서뿐만 아니라 제주에서도 단 한 건의 불법과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염원하는 좋은 나라를 꿈꾸며 침착하게 헌재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로 부패한 권력을 합법적으로 물러나게 했다.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촛불명예혁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1600만명, 제주에서만 5만여 명이 한 곳에 모였으면서도 불상사가 없었던 평화 집회였다”며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없는 자랑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퇴진 이후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적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촛불혁명의 주역인 국민들의 의지와 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