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스승

2005-08-31     제주타임스

벌써 30여 년이 지난 옛 기억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다.
거장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새”를 흥미있게 관람한 적이 있었다.
각종 새들이 동원되어 인간을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새들이 총공격 앞에서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서 인간은 참으로 외소하고 무기력한 것이었다. 시종 공포와 전율 속에서 손에 땀을 쥐며 영화관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불현듯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추억에 젖어 있는 한가함 때문이 아니다.
최근에 뉴스 프로에서 파리떼가 우글거리는 모습이 화면 가득히 채워지는 순간, 영화에서 보았던 새들의 인간 공격 장면과 겹쳐졌던 것이다.
바다를 매립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갯벌은 썩어갔다. 거기에 각종 파리 유충이 크게 번식하여 생겨난 파리떼가 갯벌을 채우고 나서 주변 마을을 온통 뒤덮은 것이다.
파리떼의 공격 앞에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말벌떼가 마을을 뒤덮고 인간을 공격한다. 말벌이 생존 터전인 산림이 마구 베어지면서, 벌들은 도회지의 기와지붕밑에 벌집을 짓고 급속히 번성하였다.
자연은 인간의 오만한 파괴 앞에서 묵묵히 죽어가는 게 아님을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는 현상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자신의 오만하고 무한정한 욕망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은 생명의 샘이다.”(타고르) 그것은 생명을 낳는 모체요, 품어 기르는 젖줄이다.

폭풍이 지난 들판에도 꽃은 핀다. 해일이 덮쳤던 땅에서도 맑은 샘물이 솟는다. 불에 탄 흙에서도 새 싹은 돋아난다. 그러나 거기에 욕망으로 얼룩진 인간의 손이 닿자 그것은 악으로 변했다.
인간이 제멋대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 아무런 방어 수단도 갖지 못한 것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이기주의로 눈이 멀어진 까닭이다. 대자연은 인간의 적대행위에 대하여 충분히 반격할 수 있는 무진장한 위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연은 그 위력이 발휘되지 아니하는 상황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이러한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 풀잎에 맺히는 이슬만큼도 못한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이기심은 끝간데를 모르도록 펼쳐지고 있다. “꿈에 서방 맞은 격”(한국 속담)으로 느껴지는 새빨간 욕망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해진다.
그래서 바다에 잠기고도 물이 부족하다고 푸념할 판이다.
최근에는 우리 고장에서 곶자왈이 광범위하게 파헤쳐져서 흉한 모습을 드러낸 보도를 보아야 했다.

사진에 나타난 살벌하고 흉칙한 풍경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을 보는 듯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황금에 눈이 어두운 자의 소행이라지만, 우리는 자연 환경 파괴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찰나적인 자기 만족을 위해, 자연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말없는 스승이다. 자연은 우리의 우호적인 자세 앞에서 물 한 방울로 생명의 신비를 속삭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적대적인 폭력에 의해서 자연은 연약한 실체인 양 묵묵히 파괴당하고만 있다. 하지만 그가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괴되는 자연은 활화산 위의 연기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는 그 경고를 엄숙히 경청해야 할 것이다.

김 영 환<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