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박하사탕
공무원을 처음 시작할 무렵 20년 전이다. 한 바닷가 마을에 90을 넘긴 혼자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키와 몸도 크고 손도 투박하고 목소리 마져 우렁찼다. 게다가 귀가 어두우셔서 눈치백단은 되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동사무소에 이분이 오시는 날이면 눈도 못 맞추고 쩔쩔맸다. 빨리 그분이 집으로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렸었고, 늘 주눅이 들곤 했었다. 옆에 직원들이 거들어 주어서야 할머님은 만족하셨는지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못 마땅한 듯 쌩하니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었다.
간이 약이였는지 꼭 우리 친할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손에는 청자담배로 기억하는데 담배 한 갑과 2홉들이 소주 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다른 직원은 절대 주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내게 주고 가시곤 했었다. 그때마다 직원들은 박장대소했다. 이제와 고백건대 난 ‘뇌물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할머니가 왜 저러실까’ 곰곰이 생각하니 집히는 데가 있었다. 내복이며, 양말 등을 갖다 드릴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물건을 드릴 때마다 내 손목을 잡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공을 갚지 못하고 저승에 가면 죄받는다”고.
그러고 보니 물건을 받으신 후 며칠 뒤면 어김없이 나타나셨고 그때마다 담배1갑과 소주 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상습적인 뇌물 공무원이 되어 가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내손을 잡고 물으셨다. “너 지지바이? 너 지지바이가?” 이렇게 말하시고선 동사무소에서 사라지셨다. 잠시 후 할머님이 나타났다. 내민 손에는 입속에 넣으면 화한 박하사탕 한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담배·소주에서 박하사탕으로 뇌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가 남자인줄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할머니가 그립고 그립다. 할머니가 건네주신 던 그 화한 맛의 박하사탕이 먹고 싶은 건 왜일까.
요즘 들어 청렴한 부분이 많아져 그 실천의 증거로 식당과 꽃집들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게 된다. 나는 과연 청렴한가.
<제주시 건입동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