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꾸고 옷 갈아입으면 책임 끝인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역설
민주주의가 진행형임을 확인
그래도 반성 모르는 사람들
‘이명박-박근혜’의 공범
‘촛불’ 이들 오만·몰염치 대한 함성
가능형으로 존재하는 광장이 희망
마침내 ‘법꾸라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박근혜의 여자’ 조윤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구속됐다. ‘무참히’ 유린된 국정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됐다고 믿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기간 이러한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배반당했다. 흐르는 강을 막고, 블랙리스틀 작성하고, 넘쳐나는 국민의 함성에 귀 막은 그들의 후안무치는 결국 국민들을 ‘광장’으로 향하게 했다.
촛불의 함성은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를 시민의 힘으로 넘고자 하는 혁명적 사건이다. 어떤 정치인은 광장의 민주주의와 의회 민주주의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혼란의 시대야말로 의회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회 민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모르고 있다. 의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완성형이 아니다. 언제나 잠재적이며 가능형으로 존재한다. 의회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이러한 의회 민주주의의 태생적 불완전성 때문에 민주주의는 진보할 수 있으며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추동할 수 있다.
권한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권한은 권력이 되고 독선이 된다. 이명박-박근혜라는 ‘괴물’을 낳게 한 정치인들이 새로운 당을 만든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치는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대지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의회 민주주의만이 정답은 아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시민의 요구를 오롯이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만이 민주주의의 대지를 확장시킬 수 있다.
새누리당이 됐든, 바른정당이 됐든 그들의 변신에는 관심이 없다. 불리하면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생명을 연장해온 세력들의 이합집산에 감동이 있을 리 만무하다. 원희룡 지사도 마찬가지다. 도당 창당식에서 원 지사를 대권 후보로 추켜세우든 말든, 그 화려한 말잔치는 공허하기만 하다.
추운 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박근혜’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오만과 편견과 몰염치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함성이었다. 그 함성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다르지 않다는 선언이다.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권력으로 착각해 온 모든 정치 세력에게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다.
제주에서 타올랐던 촛불 중에는 5·16도로의 명칭을 바꾸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쿠데타를 기념하는 도로명이 여전히 용인되는 무신경에 대한 반성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표를 달라고 했던 제주의 정치세력들도 반성을 모른다.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으면 그것으로 책임을 다한 줄 안다. 착각이다. 오만이다. 그들에게 당을 떠나, 거친 들판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대지를 방황하는 고독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묻는다.
백무산 시인은 촛불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광장은 “뜨겁게 뜨겁게 비어 있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광장은 모여 있음으로 인해 평등한 곳이며 평등하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가능성의 대지다. 모여 있으되 텅 비어 있는 광장의 역설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새롭게 채워져야 하는 ‘텅 빈 중심’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정치인들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의 평등한 목소리들로 채워지는, 그래서 새로운 함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광장이다. 그 광장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가능형으로 존재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꿈꾸는 즐거운 실험의 장이 바로 광장이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늘 새로워질 것이다. 광장의 의미도 모르고, 광장의 가능성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상상력은 기껏해야 당명을 바꾸는 일에 그치겠지만.
‘이명박-박근혜’ 시대의 공범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알리바이가 아닐까. 하지만 광장의 함성은 그들의 알량한 알리바이가 새빨간 거짓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