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汚名 벗고 재출발의 기회로

2005-08-22     강정만 편집국장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고 했지만, 날개 없는 급전직하(急轉直下)다. 하강의 강도가 커 지면(地面) 충격 또한 엄청나다. 시체의 썩는 살맛에 익숙한 ‘하이에나’들은 이번에도 좋은 먹이감을 만난 양 몰려들어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있다.
“음지에서 양지를 향한다”며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한때 국민들에게 군림하며 위세를 떨쳤던 국가정보원(국정원)은 이제 만신창이가 다 돼 버렸다. 검찰이 사상초유로 이 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면서 그들의 추락은 더 이상 여지가 없는 듯 하다. 국민여론의 호된 질책 속에서 그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있다.

모두 업보(業報)다. 우리의 국정원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가안보 기관으로서의 위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애써온 자부심에 찬 얼굴이다. 그 얼굴에 우리는 결코 침을 뱉을 수 없다. 다른 또 하나는 악명의 얼굴로 투영된다. 국가안보 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해 더 헌신해온 일그러진 얼굴이다. 정치사찰, 야당탄압, 언론탄압 등으로 주름진 그 얼굴에서는 백성을 괴롭혀온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과거 어두운 역사의 業報

작금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불법도청 사건’은 정권안보를 위했던 국정원의 저런 어두운 역사의 드러냄이다. 비록 몇몇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저지른 죄라고 하더라도 국정원 전체가 매도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사건으로 ‘독수독과(毒樹毒果)’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불법 도청이라는 ‘독수’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곳의 풍토와 환경 때문이다. 그 ‘독수’가 어떤 불순한 정치세력과의 야합으로 심어진 것이라 해도 그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뒷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고, 갖은 욕을 먹어도 국민들에 의해 동정은커녕 쪽박마저 차이는 희대의 희화가 등장하는 것은 이 연유다.

급기야 불법도청 사건은 “국정원을 해체하자”는 주장마저 심상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비록 그 한쪽에 일그러진 모습을 다 지워내지 못하고 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설립된 국정원이 이처럼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빠져 있다.
이를 그들의 업보로 돌리고 구경하면서 매도하기엔 너무 우리의 현실이 딱하다. 세계 어느 나라도 국가정보기관은 그 나라의 안보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대(對) 테러전 같은 인류의 안전을 위해서는 적극 협력한다고 한다.

어둡던 과거 일부에 의해 불법적인 도청사건이 있었다고  하여 국가정보기관의 순 기능마저 없애 버리는 것이 과연 세계 속 무한경쟁시대에 우리가 취할 태도인가를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 기능의 배제론’ 뒤에는 ‘세계 속에서 한국의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고개를 내민다.

오늘의 화두는 改過遷善

국정원이 그들에게 씌워진 오명에서 벗어나고 지금의 돌팔매를 극복하려면 우선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 필요하다. 지난날 어둡던 과거와의 단절로 이 어려움을 돌파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불법도청에 대한 엄중한 수사와 이에 따른 책임자와 행위자에 대한 무거운 처벌이 따를 때만 가능하다. 이런 과정은 국정원 스스로가 마치 ‘제례의식’처럼 모든 성의와 정열을 바쳐 한 줌 의혹이 없이 행해져야 한다. 검찰 수사에 대한 적극적 협조는 따라서 선행조건이다. 국민들은 검찰의 수사로 진실이 규명되기를 원하고 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은 오늘 국정원이 품어야 하는 화두다.

국정원은 이런 엄숙한 ‘의식(儀式)’ 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 갈 수 있다. 전쟁과 테러, 마약과 폭력범죄를 막고 산업정보를 지키는 일이 그들의 본분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국가정보기관엔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이 지원해 들어간다고 한다. 이들의 우수한 두뇌가, 그리고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이들의 신념으로 조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것 또한 이 시대가 부여한 사명이다.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다. 시련 속에서 강인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국정원의 오늘의 시련은 더 큰 성장을 위해 구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마지막 허물을 벗고 있는 것으로 보면, 오늘의 수치가 내일의 떳떳함으로, 더 큰 당당함으로 메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