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분노는 물결처럼 흐른다
우리나라 독립·민주화운동 큰 획
국가·역사의 주체 ‘우리’되기 중요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폭풍우와 같은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즉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다. ‘피흘림’의 역사를 딛고 이룩된 나라와 민족의 독립은 자유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작은 몸짓을 통해 시작됐다.
일제의 식민지배로 5000년 역사가 무너진 조국을 되찾기 위한 항일운동은 우리 민족의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다. 꼭 87년 전 오늘이었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 주도의 항일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무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정책에 대한 최대의 반항이자 독립에 대한 의지이며 우리의 언어와 역사를 배울 권리에 대한 표출이었다.
1929년 10월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학생과 조선학생의 충돌은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이어 3대 민족저항운동의 하나로 불리는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이다. 이후 학생항일운동은 광주 주변지역에 이어 전국으로 확산됐고, 동맹휴교와 함께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국 194개교 5만4000여 명이 참가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구속 1642명·퇴학 582명·무기정학 2330명이라는 조치가 이뤄질 만큼 격렬했다. 이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항쟁으로 1930년대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은 해방 후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됐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체 또한 ‘학생들’ 이었다. 특히 6·10만세 운동은 3·1운동이후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시위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올해는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87주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이후 1953년 10월 20일 제2대 국회에서 독립의 물결을 거세게 몰아치게 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그러나 1970년대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반정부 학생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정권은 1973년 ‘간소화’를 빌미로 53개의 기념일을 26개로 줄이며 학생의 날을 없애버렸다. 이후 끊임없는 노력으로 1984년 학생의 날이 부활됐다.
이렇게 지켜낸 ‘11월3일 학생의 날’은 2006년부터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돼 지금에 이른다. 폐지부터 부활까지 굴곡의 역사를 가진 기념일인 만큼 그 뜻과 정신을 지키는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은 그저 선물처럼 얻어진 것이 아니며 수많은 도전과 응전의 피흘림을 통해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5·18은’ 알지만 ‘11·3’은 잘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 역사는 또 하나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학생독립운동은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준 역사의 흐름이다. 오랜 자유의 관습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현 세대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수많은 범주 안에서 사실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떤 것에 무지하며, 무엇에 종속되어 있는지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취해야할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약자가 아니다. 지금 이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다.” 1929년 광주에서 물결처럼 퍼져나가 서울시내 각 중·고등학교에 뿌려진 학생항일운동 격문에는 ‘우리’를 역사의 주체로 표현했다. 굴욕 속에 사느니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싸운 우리 선조들의 외침을 기억해야 한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기억하고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위해 그리고 나라의 주인이 되는 ‘우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