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의 파워 게임
자율이냐, 타율이냐, 선택의 기로
‘홉슨의 선택(Hobson’s choise)’이라는 말이 있다.
선택의 여지가 극히 제한적일 때 인용되는 말이다. 예컨데 빵이냐 밥이냐를 놓고 고르는 다양성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빵만을 놓고 먹을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
‘토머스 홉슨’은 17세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구간 마름이었다.
그는 돈을 받고 학생들에게 말을 빌려주면서 좋은 말은 마구간에 묶어 둔 채 학생들에게는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대신에 비루먹은 볼품없는 말을 마구간 입구에 매어두고 “빌려 갈 테면 가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아예 좋은 말은 엄두도 못내고 비루먹은 말을 빌리느냐, 마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홉슨의 선택’은 여기서 유래됐다.
그런데 지금 제주교육대학이 바로 이 같은 홉슨의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것도 선택 시한이 8월말까지다.
앞으로 남은 13일 동안 상처 난 자율을 일으켜 세우느냐, 아니면 이를 팽개쳐 버리고 조종되는 타율을 선택하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타락하는 교대 교수들
제주교육대학 교수들은 지난해 5월26일부터 학내 권력게임에 취해 비틀거리며 지금까지도 편을 갈라 부지런히 타락하고 있다. 1년3개월을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하여 상대편을 씹으며 증오의 이빨을 갈고 있는 것이다.
풍화되지 않는 거친 감성과 궤변적 논리로 무장된 정서적 집단심리가 편가르기에 동원되고 이것이 제어불능이 되어 집단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총장선거가 발단이 된 제주교대 교수들의 집단발작은 그래서 제주교수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이나 다름없다.
교수 집단의 자질과 윤리적 한계 영역에 구정물을 쏟아 붓는 행패며 제주초등교육에 대한 패륜이기도 하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우물물을 더럽힌다’는 비유가 딱이다.
교수는 사회의 근본적 가치와 윤리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지도층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식견을 넓혀주고 잘못을 꾸짖어 깨우치게하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제주교대 교수들은 이를 방기하고 있다. 스스로의 권리도 짓밟아 버리고 있다.
자율 지키지 못하면 대학 떠나야
특히 제주교육대학 교수는 내일의 제주초등교육을 담당할 교사요원을 양성하는 초등교육의 등불이며 길라잡이다. 그만큼 책무가 무겁고 사명감이 투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 1년3개월 가까이 총장 감투싸움으로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면 이는 제주교육에 대한 훼절(毁節)이나 다름없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반장 선거에서도 아름다운 축하와 위로가 꽃을 피우는데 할아버지 벌 교수들의 추하고 뒤틀린 감투싸움이 제주초등교육의 독버섯으로 자라난다면 이는 제주교육의 여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교대 교수들은 당장 총장권력 게임의 귀족놀음을 집어치우고 대학을 정상으로 돌려놔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교육부총리가 8월말까지 자율정리가 안되면 정부에서 총장을 임명하고 제주대와의 통폐합도 검토한다고 피력하지 않았던가.
제주교대 총학생회도 오죽하면 외부총장 초빙을 거론하고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 제주교대 교수들의 선택은 그만큼 절박하고 시급하다.
만약 8월말까지 자율을 지키지 못하고 타율을 부른다면 관련 교수들은 모두 대학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대학 교수로서의 자질과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회적 경고를 외면하다가는 그들의 오만한 이마에 ‘대학 파행교수’라는 낙인이 찍혀 퇴출되는 불명예를 당하지 말란 법도 없다.
한줌 권력에의 열망이 절망을 낳고 멸망을 자초할지도 모를 일이다. 뼈 발리는 아픔으로 새겨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