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사과’에도 더 끓는 성난 민심
‘짐이 부덕한 소치로…’ ‘과인이 불민하여 백성들이 이 고초를 겪고 있다’ 왕조시대에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면 임금들은 스스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교서를 ‘책기교서(責己敎書)’라고 했다. 이른바 국왕의 ‘실정(失政) 공개 사과문’이다.
당시 사과문엔 구체적인 반성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고려 선종은 가뭄이 심하자 기우제를 지내면서 여섯 가지 사안을 거론하며 자책(自責)했다. ‘정치가 한결같지 못했는가, 백성들 직업이 없지 않았는가, 궁궐이 사치했는가, 아녀자들의 청탁이 성행했는가, 뇌물이 행해졌는가, 아첨꾼들이 득세했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최순실 국정(國政) 농단’과 관련 대국민 사과를 했다.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등에서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취임 후에도 일부 의견을 들은 적이 있으나 청와대 및 보좌체제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다”며 “저로서는 순순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성난 민심(民心)이 진정되긴 커녕 오히려 더 끓고 있다. 사과문에 진정성과 구체적인 내용이 없을뿐더러, 향후 조치 등과 관련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선종이 사과한 여섯 가지 중 반만이라도 제시했더라면 국민 여론이 이렇게 들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청와대 인적쇄신과 전면적인 개각 단행, 대통령의 탈당 등을 주장하고 나섰겠는가. 특히 야권에선 국정조사나 특검제 도입은 물론 대통령 탄핵과 스스로 하야(下野)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신하로서 내가 올리는 말이 틀리면 이 도끼로 나의 목을 치라는 것이 바로 지부상소(持斧上疏)다. 온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지부상소의 결기’는 커녕, 집권여당 대표란 이는 “나도 연설문 같은 걸 쓸 때 친구 이야기를 듣는다”는 딴소리나 해대며 국민들 울화를 더욱 돋우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국정의 책임자인 박 대통령이 서 있다는 사실을 보며, 지금 국민들은 참담하고 서글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