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과 상류층의 도덕적 건전성

2016-10-04     박상수

공손앙 10년내 진나라 법치국가로
태자·왕족 구분 없는 법적용
좋은 본보기 백성들 모두 법 지켜

김영란법 차차 적응 편리해질 것
문제는 ‘특권층의 특혜’ 근절
그들을 위한 ‘특별법’이라도 필요

중국의 전국시대에 위(衛)나라 사람 공손앙(公孫鞅)은 법률에 밝았고 법가(法家)로 불렸다. 위나라 재상 공숙좌가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위나라 혜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손앙은 위나라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진(秦)나라로 갔고, 효공(孝公)이 그를 발탁, 나라를 개혁하도록 했다. 공손앙의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으나 효공은 공손앙을 적극 지원했다.

공손앙은 법을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법 공포 전에 본보기를 보여준다. 남문에 나무를 세워놓고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금 10냥을 준다”는 방을 써서 붙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금 50냥으로 올렸다. 모두가 믿지 않았으나 어떤 사람이 나무를 옮기자 방에 써서 붙인 대로 금 50냥을 주었다.

드디어 법률을 공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자가 법을 어겼다. 태자는 왕이 될 사람이라 직접 형벌을 가할 수는 없어서 대신 후견인인 공자건과 공손가를 처벌했다. 이를 본 백성들이 법을 잘 지키기 시작했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진나라는 법치국가가 됐다. 군역을 피하거나 도둑질·살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그 후 공손앙이 위나라를 정벌, 공을 세우자 효공은 공손앙을 상에 봉했고, 그 후 ‘상앙(商鞅)’이라 불리게 됐다. 그 이후 공자건이 다시 법을 어기자 코를 베는 형벌을 가했고 그는 밖으로 나다닐 수 없게 됐다. 상앙은 특히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의 특권을 없앴다. 나라에 공을 세우지 못하면 전에 받았던 식읍까지 빼앗기는 일이 생겼고, 왕족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일들도 빈발했다. 더불어 왕 자신도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혜왕이 되자 공자건의 무리들이 상앙을 모함했다. 상앙은 위나라로 도망쳤으나 받아주지 않아서 결국 진나라로 돌아와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처형됐다.

상앙의 법은 일반 백성들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됐고, 혜왕도 비록 처형했으나 상앙의 법을 계속 지켰다고 한다. 이 후의 왕들도 상앙의 법을 지켰으며, 100여년이 지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밑거름이 됐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소위 ‘김영란법’이 9월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고급식당·꽃집·축산농가 등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고, 공무원 등도 몸조심하느라 혼란스럽다.

법의 취지는 혈연·지연·학연 등의 인맥에 의한 청탁, 금전에 의한 청탁 등을 방지하고, 나아가 깨끗하고 밝은 사회의 실현으로 보인다. 일종의 관행이라고 할 수 있었던 부정한 선물 주고받기의 근절도 노리고 있다.

처음 상앙의 법이 시행됐을 때처럼 국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고, 관습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냐며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면 사람들은 법 테두리 안에서 행동함에 따른 편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청탁은 금전이나 식사 등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종 동문회·모임 등에서 인맥을 쌓고서 전화나 말로서 ‘부정한’ 청탁이 실행되곤 한다. 특히 권력자가 하급기관에 취업·사건 무마 등을 청탁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상앙의 법과 같이 국가 100년 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최상류층의 도덕적 건전성을 강요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의 보완, 그리고 예외 없는 법 시행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예컨대 부정축재를 해도 대통령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이라며 사면한다거나, 부정 사업가나 권력자들의 교도소 하루 일당 수천만원인 ‘황제노역’, 부정한 짓을 한 혐의가 있음에도 장관·비서관 등에 그냥 두거나 임명하는 등 일련의 일들이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 김영란법은 오로지 하위직 공무원이나 권력 없는 교사 등을 옥죄는 법이라고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상앙의 법이 진나라의 강성을 불러온 것은 그 법이 전반적으로 모든 국민, 특히 모범을 보여야 할 상류층에게 가혹하게 적용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