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의 외침’이 절실한 나라
나폴레옹과의 전쟁서 패한 독일
한 철학자 ‘국민에게 告함’ 연설로
‘자신감 회복·민족혼 재건’ 일어서
‘총체적 난국’ 직면한 대한민국
정치권 등 모두가 ‘나 몰라라…’
꽉 막힌 숨통 틔워줄 超人은 없나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독일은 대패(大敗)했다. 국토는 분할되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이 지워졌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자포자기했다. 희망을 잃은 독일 국민들 또한 낙담과 절망의 늪에 빠졌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가 철학자인 J.G. 피히테였다. 그는 프랑스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베를린대학 강당에서 총 10여 회가 넘는 강연을 통해 열변(熱辯)을 토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이라는 제목의 명연설이 바로 그것이다.
피히테는 “독일이 왜 패망하였는가?”라고 국민들에게 되묻는다. 우리 군대는 약하고 프랑스 군대는 강해서? 그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독일이 패망(敗亡)한 것은 독일인의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 때문이란 것. 나라가 어려울 때 지식인 등 사회 지도층들이 방관만 하는, 그 이기심이 국가를 망쳤다는 것이다.
그의 물음은 “이제 독일을 재건할 길은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결론은 ‘국민 교육을 통한 민족혼의 재건(再建)’이었다.
피히테의 열변에 감동한 독일 국민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회복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시작으로 도덕 재무장과 민족혼을 깨우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60여년이 흐른 1871년,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普佛戰爭)에서 대승을 거두고 파리를 점령했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독일인의 우월성과 강대함을 재확인하자는 외침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철 지난 민족주의자의 통속적 연설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결연한 목소리로 국민들의 단합과 연대를 외쳐 슬기롭게 난국을 헤쳐 나갔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대한민국은 ‘총체적 난국(難局)’에 직면해 있다. 국제적으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란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이로 인해 국론(國論)도 분열됐다. ‘우리 집 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 탓도 있지만, 사전에 대국민 설득 노력을 도외시한 정부 측의 책임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성공으로 북한의 ‘핵(核) 위협’은 우려가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북은 김정은이 나서 이번 발사를 ‘성공 중의 성공’으로 평가했고, 우리 정부도 그 실체를 인정했다.
그만큼 북한의 군사적 도발 위협은 이제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과연 우리 정부가 이에 걸맞은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여기에 더해 ‘안보 불감증(不感症)’에 젖어있는 국민들 역시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무사태평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안보와 경제 등 대내외적 환경이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계파를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잔치’에 여념이 없다.
‘4·13 총선’에 나타난 국민들의 냉엄한 심판은 여·야 모두가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그 뿐이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도로 친박(親朴)과 친문(親文)’으로 회귀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그들의 뇌리엔 양극화나 청년실업 해결 등의 ‘국리민복’은 안중에도 없고 ‘차기 대권욕’으로만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집권당 대표는 정국의 뇌관(雷管)인 ‘우병우 민정수석’의 ‘우’자도 꺼내지 못한 채 침묵수행 중이다. 야권도 친문세력의 득세 속에 ‘제3지대론’이란 새 불을 지피며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래저래 그들을 지지했거나 지켜보는 국민들만 허탈하고 불쌍할 따름이다.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겐 ‘한국 국민에게 고함’이란 절절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제2의 피히테’가 아니어도 좋다. 지식인들마저 편을 가르고 서로 돌아선 마당에 ‘재야의 고수(高手)’가 나서든 그 누구라도 상관 없다. 어떤 결과를 떠나 우리들의 꽉 막힌 숨통을 틔워 주고, 한 줄기의 빛을 선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족하다.
암울했던 일제의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丹齋)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젊은 청년과 후세대에 설파한 바 있다. 이육사도 그의 시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울리라”고 노래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던 결기 서린 단재나, 이육사의 그런 ‘초인’은 정녕 이 시대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