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 대화

2005-08-03     제주타임스

고대의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기준을 감각에서 구하려고 했다. 직접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고 듣는 데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며 혼돈의 가운데에서 질서를 세우는 사유의 법칙을 세웠다. 중세 스콜라 철학 또한 관념은 소리나 빛보다 큰 실재성을 갖는다고 했다. 물적인 것은 보편개념의 특수한 형태라고 하며 이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진리의 발견에 있어서 이성의 편에 있는 이들의 주장에서 보면 감성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 또한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한다. 장미의 색깔을 보자.  아침에 바라보는 색과 저녁에 바라보는 장미색은 다르다. 피어날 때와 질 때의 장미색도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색을 진짜 장미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맛은 어떠한가.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구역질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감각은 도저히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행동에 있어서나 대화에 있어서 감각이 이성보다 빠르게 들어와 우리를 사로잡는다. 어떤 현상과 부딪혔을 때 시각, 소리, 촉감, 맛 등을 하나로 결합하여 주관적인 결론을 도출을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감각적 오류로 인하여 많은 것들이 본질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영구히 모순되지 않는 감각을 찾아야만 한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것은 사실 감각 너머에 있는 무지개를 찾는 일과 흡사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할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둘이서 대화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점을 이해하지 않고 대화를 하면 수많은 감각적 오류를 범하게 되어 오해와 상처의 화살이 서로에게 오고 갈 수밖에 없다.
나와 무의식 속의 나, 그리고 상대방과 상대방의 무의식이 서로 엇갈리며 대화를 하고 있다. 상대방이 얘기를 해 올 경우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식적으로 표현되는 감각에만 치중을 해서 듣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겉으로 드러난 표정, 말의 억양, 행동 등등.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호르몬의 분비가 다르다.  플러스 발상을 가진 사람들은 면역성이 강해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베타-엔돌핀이 분비되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화에 있어서도 이성적인 플러스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상과 목소리 톤이 신경질 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상대방이 화났다고 단정해버리는 감각적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성격은 참으로 다양하다. 화가 났다가 쉽게 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번 화나면 즉시 풀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말싸움을 할 경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고 꼭 화해할 의사가 없다는 것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이 끓다가 천천히 식듯이 이미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의 불을 꺼졌지만 잠시 끓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하더라도 플러스 대화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아차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떻게 플러스 대화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방법은 이외로 간단하다. 들을 때 감정을 자극하는 목소리 톤이나 표정을 빼고 들어보도록 노력하자. 불순물을 제거하고 듣다보면 화는 내고 있지만 실상은 화해하려는 의지의 대화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을 알고 나면 대화는 술술 풀리며 결국 싸움의 끝에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커다란 미안감 뿐이다. 그 순간 비갠 후의 희망을 보여주듯 무지개가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 한다. 하지만 싸움이라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싸움도 대화이다. 다만 격한 대화이다. 싸움을 억지로 피하다 보면 점점 더 마음에 응어리만 쌓이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될 경우 상대방의 잘못만 탓하다 보면 플러스대화는 기대하지 못한다.

싸움의 문제점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플러스 대화를 열어나간다면 오히려 비온 후 굳은 땅처럼 둘 사이에는 더 깊은 믿음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강 연 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