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줄 알았다"

2005-07-21     김원민 논설위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독설가로 이름 높았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써놓고 시니컬하게 자기 생애를 조롱하였다고 한다.
 이를 화두로 삼는 이유는 정부가 가난한 미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올해 도입한 미술은행(Art Bank) 제도가 출발부터 절뚝거리고 있다니 버나드 쇼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정말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냉소(冷笑)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관(官)에서 주도하는 미술정책이 오죽하겠느냐고 당초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술진흥을 위해서 ‘돈을 푼다’는 데서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잡았던 것인데 그 결말은 ‘혹시나’에서 ‘역시나’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미술은행'의 파행 운행

미술은행은 문화관광부가 미술시장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한다는 취지에서 올해 25억 원의 예산으로 200∼300점의 미술품을 구입한다는 계획 아래 처음 시행된 것.
 그러나 이 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미술은행이 자칫 성별, 연령별, 장르별, 지역별, 학교별 안배를 고려한 선심성, 소액 다건주의식으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었거니와, 이런 우려는 올 상반기 시행 과정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문광부가 당초 계획했던 올 미술품 구입 예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8억8980만 원으로 이미 202점의 작품을 구입한 것만 보더라도 미술은행 제도가 선심성 소액 다건주의로 변질되고 있다는 분석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또 신진 작가의 창작 의욕 고취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기성작가 위주로 구입이 이뤄졌는가 하면 서울과 인천, 경기지역 등 수도권 출신 작가가 69%를 차지해 지역이 편중됨은 물론, 출신학교별로는 H대와 S대 출신을 합해 75명으로 특정 학교 편중 현상도 심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는 미술은행이 제주에서 구입한 작품이 특정 대학 교수와 강사의 작품에 치우쳐 미술은행 설립 취지를 퇴색시키고 있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미협은 이 같은 현상이 작품 구입을 심사하는 추천위원들이 특정 대학 교수로 채워졌기 때문이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추천위원들의 면면을 공개할 것도 요구하고 있다.
 기자는 이미 본 란을 통해 추천위원 구성에 있어서 지역을 안배하고, 제주도처럼 세가 약하고 작은 지역의 작가들에게 보다 많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 바 있다.

 하지만 결과는 수도권과 특정 학교 편중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신진 작가를 배려하기보다는 어느 단체 이사장의 작품부터 상당수의 대학교수, 미술단체 임원들의 작품이 다수 선정됐고, 아마추어인 미술동호인 회원 작품까지 끼어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여서 아연할 뿐이다.

작가들 위화감만 키워

  그러니까 선택과 집중은 배제되고 소액 다건식 나눠주기와 선심성, 수혜성 작품 구입이 아니냐는 것인데 결국 비인기 작가를 지원하고 신인을 발굴한다는 미술은행의 설립 취지는 간데 없는 채 미술인들의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을 부추기고 위화감만 키우는 꼴이 됐다.
 따지고 보면 미술은행에 투자되는 돈은 국민의 혈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를 눈 먼 돈처럼 펑펑 사용해서는 국민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국민세금을 9억 원 가까이 쓰면서 구입한 작품들이 편파성이나 나눠주기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진정 미술진흥을 위한다면 작품을 사 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역량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신진 작가를 집중 육성하는 입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미술은행 설립의 의미를   살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자조(自嘲)의 목소리만 나와서는 “미술 어쩌고…”하는 것도 백년 하청(百年河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