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건(土建) 대신 예술(藝術)로”

2016-04-12     송경호

지난해 연말 당일치기 제주여행
칠성로 아트페어 관람 ‘출장’
발랄한 발상에 몇 뼘 성장한 느낌

산지천 아라리오뮤지엄도 훌륭
옛 제주대병원 활용 ‘탁월’
예술적 기운 제주의 소중한 자산

일터 가듯 당일치기로 제주에 다녀왔다. 지난해 연말 일이다. 김포에서 새벽 비행기를, 제주에선 저녁 비행기를 탔다. 명목은 출장. 제주 옛 도심 칠성로의 아트페어 구경이다. 겸사겸사해 옛 도심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이런저런 징후를 들여다봤다. 한때 영화로웠던 곳, 그러나 이제는 늙어 변방으로 떠밀려 나앉은 옛 도심. 그 곳이 기운 되찾는 데는 예술만 한 게 없겠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관련 프로젝트는 그런 믿음에 기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칠성로의 이른바 여관골목에서 열린 제주아트페어로 두 번째 ‘만남’이다. 처음은 한 해 전인 2014년 11월이다. 칠성로를 지나는 길에 만난 제주 후배 권유로 둘러보곤 반했다. 골목 사이로 머리 맞댄 숙박업소들이 손 모아 벌였다는 게 흥미로웠다.

호텔과 여관·게스트하우스 등이 앞 다퉈 방을 내놔 전시장으로 꾸민 발상이 발랄했다. 침대는 물론 욕실과 심지어 화장실 위에 각자의 작품을 늘어놓은 작가들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작은 방 안에서 구경꾼과 작가가 작품을 두고 나누는 대화도 훈훈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누비며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기쁨과 보람이었다.

2회째를 맞은 아트페어는 몇 뼘쯤 키 자란 느낌이었다. 성장 잠재력에 초점을 맞춘 듯 젊은 작가들이 많았다. 작가들과 관객을 대상으로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를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당일치기 빠듯한 일정이지만 내친 김에 아라리오뮤지엄 두 곳에 들렀다. 산지천 건너 동문모텔1,2다. 과거 뱃사람들이나 ‘머구리’들이 찾던 모텔을 개조해 만든 전시관이다.

모텔에서 뮤지엄으로 이름과 용도가 바뀌었지만, 곳곳에 남은 흔적은 작품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공간에 지문처럼 찍힌 과거의 흔적이 오늘의 예술작품과 어울려 빚어내는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미술계의 큰 손인 컬렉터가 사재를 들여 옛 도심에 연 뮤지엄들은 제주시의 특별한 예술적 자산이 될 것으로 보였다.

서둘러 과거 제주대병원 건물도 들렀다. 그 곳을 예술창작과 전시 등을 위한 장소로 활용한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듣곤 반가웠다. 탁월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건물의 장소성을 재해석하는 프로그램으로 13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둘러보았다. 병원에서 예술 공간으로의 변환이 진행 중인 건물은 어수선했다. 일부 벽체는 철거 중이며, 콘크리트가 노출된 공간을 적절히 활용한 설치작품들이 다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전시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공간을 과연 누가, 어떻게 운영할지 일 것.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다만, 공공부문이 지역 예술인들을 믿고, 그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에 기댄다면 옛 제주대병원 건물은 도심의 또 다른 명소로 거듭나리라는 기대가 컸다.

제주시 옛 도심 일대를 부지런히 오간 일정은 느닷없는 말고기 식사로 마무리됐다. 하루 일정을 함께 한 제주 토박이 후배들은 한사코 ‘특별한 경험’을 강권했다. 후배들이 “잘 하는 집”이라며 안내한 식당에서 난생 처음 먹은 말고기는 과연 특별했다. 동행한 팀장 역시 뜻 깊은 식사며 경험이라고 했다. 단 하루 동안의 출장이었지만 마음과 함께 몸도 뿌듯해진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팀장은 부럽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해댔다.

아무리 옛 도심이지만 그 비싼 땅에 앉은 건물을 예술가들에게 내준다는 게 부러웠단다. 칠성로 숙박업소들이 예술가들을 위해 며칠씩 방을 내준다는 것도 너무 부럽다고 고개를 흔들어 댔다. 방 하나하나가 다 돈인데. 아라리오뮤지엄도 그렇다. 제주 옛 도심을 택한 컬렉터의 안목도 안목이지만, 주민들에 익숙한 공간의 이미지를 지우지 않은 배려가 빛나 보였다고 했다.

해 짧은 겨울 초입의 9시간 동안 제주 나들이는 몸과 마음의 충만함과 함께 부러움으로 마무리됐다. 아울러 그런 예술적 기운이야말로 제주의 소중한 자산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 자산이 날로 더 크고 넓게 번져나간다면, 굳이 토건에 기댈 이유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