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가엾고 고됐던 내 어머니의 삶”

어미 등에 업혀 생사 오가던 ‘두살배기’
69세 노인돼 어제 모교서 4·3평화교육

2016-03-28     문정임 기자

전교생이 80명인 바닷가의 작은 학교 북촌초등학교. 68년 전 이 곳에서는, 하룻밤 사이 300호가 불타고 500여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사살됐다. 살아남은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던 비극의 장소에서 28일 4·3명예교사의 4·3평화·인권교육이 이뤄졌다.

북촌마을에 비극이 시작된 건 1948년 6월 16일(음력), 북촌포구에 정박 중이던 우도 배에서 경찰 2명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하면서였다. 이 날을 계기로 북촌리는 '빨갱이 마을'로 지목됐다. 5개월 뒤, 초토화 작전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북촌리 청년들에게 군부대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5·10 총선거에 불참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의 무리에는 서른 살 남짓이던 요범의 아비도 있었다. 두 살배기 아들을 등에 업은 요범 어미는 눈 근처에 총을 맞은 남편의 시신을 붙잡고 울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한 달 뒤, 군인 2명이 북촌 너븐숭이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되자 군인들은 마을 보초를 섰던 노인들을 총살했다. 그들 가운데 요범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요범의 어미는 남편과 시아버지, 두 명의 시아주버니, 친정 부모, 남동생을 잃었다. 살아남은 어미는 어린 아들을 안고 시어머니와 부모 잃은 조카 네 명을 데리고 하루하루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어미 등에 업혀 깊은 한숨을 자장가 삼아 자랐던 아들 요범은 지금 69세의 노인이 되어 2016년 아이들에게 4·3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날 4·3교육에는 북촌초 3~6학년 학생 50여명이 참석했다. 아이들 옆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네 어르신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같은 마을 주민이기도 한 황요범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치맛단으로 소매 단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았다.

이날 설명은 앞서 제주도교육청의 사전 연수를 토대로 4·3당시 도내·외 정세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는데 초점 맞춰졌다. 정부가 집계한 사망자 등 피해자 수를 마을별로 정리한 도표와, 북촌리 주변에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을 사진으로 보였다.

6학년 이소진 양은 “우리 학교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다니 무섭다”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북촌초에서는 부교재 등을 활용해 매년 4·3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4·3희생자유족이 직접 교단에 서면서 생생함이 배가되고 있다. 여기에 북촌초 6회 졸업생이기도 한 황 씨의 이날 강연은 더 의미가 컸다.

황씨는 수업 도중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처음 해보는 4·3이야기가 아닐 텐데도, 여전히 4·3은 가엾고 고됐던 그와 그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황씨는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날의 참상을 서푼이야기로 대신한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후세들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강연 말미, 강당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짐을 챙기려는 아이들의 부산함이 서운하지도 않은 지, 황씨는 또박또박 부탁의 말을 이어갔다. “4·3을 잊지 말아주세요. 4·3을 꼭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