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몽골의 만남 740년
‘몽골 순제의 제주 피난 궁전’ 발표
학자·행정 관심으로 역사 넓혀가야
한·몽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26일 제주대에서 열렸다. 제37회를 맞이한 학술대회는 올해가 제주-몽골 교류 740주년이어서 (사)한국몽골학회·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한국외대 몽골연구센터·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가 주최하고 제주대·제주문화유산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주한몽골대사관 등이 후원하며 규모와 의미가 더욱 컸다.
이날 정치와 경제, 제주-몽골, 고려-몽골, 몽골-동아시아 등 5개의 분과주제로 35개의 발표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에 앞서 몽골의상패션쇼도 선보였다. 몽골에서도 국회의원, 한국주재 몽골대사, 학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국내 몽골전문가들도 총출동한 듯했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삼별초 정벌 후 1276년 몽고에서 제주에 말을 보내 방목하면서 100여년간 몽고지배기를 거친 적이 있다. 이 기간 뿐 만아니라 이후에도 몽고와 제주의 문화접촉, 문화변동,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고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몽골이 제주도 전체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제주도의 시대구분을 몽고지배기 이전과 이후를 역사적인 분기로 설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고려시대 탐라가 고려에 복속되기는 했으나, 고려정부는 제주에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라는 직함을 주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몽고지배기에 성주가 원(元)왕실에 가기까지 했다. 몽고가 고려정부를 인정하면서도 제주에 대한 권한은 지속적으로 확대해 가는데, 이는 제주도 중산간 넓은 목장에서 말을 공출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일본정벌을 위해 수백척의 전함을 만들라고까지 했다. 말목장의 번성은 몽고지배기 이후에도 목호(목자)들이 권한이 확대돼 제주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고려정부는 최영장군으로 하여금 2만5000명의 군사를 보내 토벌하기에 이른다.
이번 발표에서 주목을 끈 것 가운데 하나는 김일우 박사의 ‘몽골 순제의 제주피난궁전을 찾아서’라는 주제인데, 강정동 대궐터로 추정한 것이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지난 2015년 ‘제주 강정동 대궐터’를 발굴조사 한 바 있다. 이번 발표는 송정규 목사의 ‘해외문견록’ 사료를 접목시킨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강정대궐터가 처음으로 고고학적 연구성과와 더불어 문헌사학적인 연구성과로 인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몽고지배기 뿐만 아니라 그 후 제주도 서남부지역은 대궐터를 비롯한 다른 유적(법화사·왕자묘 등)과 관련해 주요 거점지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 강정천(가래천) 주변에 산재해 있으며, 최근 강창학구장 서편 오름 자락에 집단묘가 발견된 바 있다. 무덤은 왕자묘보다 작지만 유사한 형태의 무덤이 15기 이상 알려져 있다. 방형의 석곽묘 형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를 통해 법화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몽고지배기 이후 관련 집단이 상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해외문견록(海外問見錄의 洪爐宮基 중 大闕基)을 근거로, 또한 발굴조사 자료를 근거로 강정동 대궐터를 원순제 피난궁터로 비정하고 있다. 원순제에 의해 1367년부터 1369년까지 피난궁전이 조성되다가 그만두게 된다.
이후 백백태자(1382년), 양왕의 가속(1382년), 주택건설 및 수리(1388년), 애안첩목아(1392) 등 제주로 이주했다는 일련의 기록은 원왕실이 제주에 가졌던 상당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를 종합해보면 강정동대궐터가 원순제의 피난궁터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원이 멸망 후 다른 이주민집단의 주택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번 학술대회는 많은 성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지속돼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학자들뿐만 아니라 행정의 관심도 증대, 제주의 역사가 보다 다양한 관심과 인식의 폭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