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대형 정신병동에 대한 우려

2016-03-22     안혜경

영화 가족생활의 제니스
10대 임신 후 강요된 ‘정신병자’
기존 ‘틀’ 고집 병원 때문 나락으로 

우리나라 교육 ‘길들이기’ 문제
국가로 확산되면 ‘갇혀 사는’ 형국
통제·감시 하려는 힘 거부해야 

제주로 이주한 오한숙희 여성학자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 난 그 분에게서 자녀 교육의 지혜를 나눠 받았다. 부고 소식은 자연스럽게 늦깎이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 하신다던 그 분의 생전 모습과 나의 초보 엄마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난 아이의 자유의사를 존중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난 방법을 잘 몰랐고 늘 갈팡질팡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 하며 둘째까지 낳아 키우던 차에 오한숙희의 ‘그래, 수다로 풀자’라는 책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오한숙희는 여성학자로서 당시 우리들 삶에 새로운 도전 혹은 이해를 가져오는 놀라운 강연을 전국적으로 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책을 읽게 됐다.

그가 자기의 생각을 자신 있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쏟아내는 말에 어머니가 늘 귀 기울여주었던 덕이라고 했다. 그 얘기에 요새말로 ‘심쿵’했다. 내겐 충격적인 깨달음이었고 그 후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엄마가 되고자 노력했다. 여전히 어설펐지만 엄마로서 그 ‘심쿵’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난 큰 지혜를 나눠 받았다.

‘빵과 장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지미스 홀’ 등 노동자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체제의 억압자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켄 로치 감독. 그의 오래된 영화 ‘가족 생활(Family Life·1971년)’을 최근 보았다.

만든 지 45년이나 지난 영화였지만 지금도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제니스’는 19세 소녀로 임신까지 하게 되어 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힘든 상황에 처한다. 게다가 자신들의 생각과 신념만을 고집하는 강압적인 부모에게 시달리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게 된다.

제니스의 부모는 딸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들은 딸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무조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로 그들의 가치와 방식을 강요한다. 결국 제니스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환자의 주변 환경과 관계를 통합적으로 살피면서 가정교육 방식에 대해 부모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제니스의 자유의지를 독려하던 정신과 의사를 만나면서 차도가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기존의 약물치료와 전기치료만을 고집하는 의사들과 단순한 행정 처리를 원하는 병원 직원에 의해 그 정신과의사는 재고용되지 못하면서 제니스는 최악의 치료 상황을 맞게 되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다양한 독서와 운동과 여행 등 질풍노도의 성장기를 거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모색해나가며 헌신적인 임상의가 되어 환자를 돌봤던 신경과 전문의이자 저술가로 유명한 올리버 색스(Oliver Sacks·1933~2015) 박사. 그 역시도 그의 자서전에 그런 치료 경험을 적었다. 그가 정신과 환자에 대한 ‘처벌 치료’에 거부감을 갖고 환자들 각자가 지닌 긍정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치료를 시도하자, 말을 못하는 아이로 알았던 환자가 다양한 체험 치료 덕에 단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간호사들과 색스 박사는 놀라고 감동받지만, 동료들의 배척으로 해고당하며 그 병원 환자치료를 포기하고 만다.

교육이 아이의 인격과 재능을 함양하는 선을 넘어 학대와 사육의 정도에 미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도 엄마에게 ‘이제 뭘 할지’, 심지어 판사로서 ‘판결을 어찌 내릴지’ 묻는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길들이기 교육이 공공매체와 제도를 통해 국가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된다.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 되어갈 때, 우리 모두는 ‘제니스’가 되어 자유의사를 잃고 국가라는 대형 정신병동에 갇혀 시들어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의미 있는 삶이 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상적인 생활, 주체성, 존엄성, 자존감, 자율성’ 등은 어떻게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힘을 기억하고 거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