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히 일어섰으나 외면당한 ‘영웅들’
3·1절 기획 -잊혀가는 ‘해녀항일운동’ <上>
1만7000명 참가 ‘해녀 항쟁’ 유공자 고작 11명
‘부끄러운’ 후손들…지금이라도 재조명 나서야
“그 일본사람덜 허고 싸웁던 그 시절 그 마음 그 열정은 그대로 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어요. 내가 죽어서도 제주도에 그 모임이 이실 적에는 영혼으로라도 참석하겠어요. 그런 마음 내 각오하고 있어요.”
제주 해녀항일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고(故) 김옥련 해녀(1907~2005년)는 1995년8월30일 부산 영도구 봉래동 자택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어서라도 일제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해녀항일운동은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제주도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인 상인만을 위한 어용 해녀조합에 맞선 해녀들의 항거였고, 1931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연인원 1만7000여명이 참가했고, 대·소집회 및 시위 횟수가 연 230여 회에 달했던 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중 단 11명만이 2000년대 들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특히 해녀항일운동을 이끌었던 5인의 해녀 가운데 김옥련·부춘화·부덕량씨 외에 고순효·김계석씨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강창협 해녀항일기념사업회장은 “이 두 해녀 외에도 수많은 해녀들이 항일운동에 참여했지만, 자료 부족 등의 문제로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보훈청으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려면 그 당시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증거 기록이 필요하지만 현재는 관련 기록이 많지 않은 상태다. 이는 해녀항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이념 문제가 결부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박찬식 박사는 “항쟁을 주도했던 해녀들이 혁우동맹 등 사회주의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해방 후 제주도에 4·3사건으로 ‘레드콤플렉스’가 생기면서 사회주의가 개입된 해녀항쟁에 도민사회가 애써 고개를 돌려 관련 조사들이 많이 이뤄지지 못 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 해녀항쟁의 증인들이 많이 살아있을 때 관련 조사가 이뤄졌다면 현재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될 수도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박찬식 박사는 이어 “역사는 정치적으로나 이념 문제로 바라볼 게 아니라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며 “역사를 이념적으로 바라봤을 때 정작 소외되는 사람들은 항일운동가들”이라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