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다림 끝 찾아온 만남은 너무 짧았다
설 명절 양로원 모습
반갑고 아쉬움 만감교차
짧은 해후에 안타까움만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커피 마시고 가”
한 평 남짓한 방. 김정숙(가명·86) 할머니는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커피 봉지를 꺼냈다. “커피 두 개 타 먹어. 설탕도 듬뿍 넣고. 커피는 달달하게 먹어야 맛있어”
지난 6일 오전 10시께. 제주시 모 양로원은 설맞이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요양보호사들은 아침 일찍부터 노인들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노인들은 각자 방에서 한복을 입거나 화장을 하며 몸 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깐 귀찮아서 한복 안 입어. 나는 그냥 갈 거야” 한복을 입은 옆방 할머니를 보고 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무심히 얘기했지만, 요 며칠 전부터 머리도 새로 하며 설을 기다린 듯 했다.
김 할머니는 11년 전 이곳에 왔다. 전에는 서귀포시 한 어촌에서 어선을 운영하는 남편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남편이 죽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기초생활 수급자 노인들만 들어올 수 있는 이 양로원에서 지냈다.
“설날엔 딸애가 온다고 했어” 할머니는 딸네 가족을 위해서 그동안 시설에서 받은 과자, 과일 등을 안 먹고 챙겨왔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딸을 많이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시설에 근무하는 한 요양보호사는 “명절 며칠 전부터 어르신들이 가족에게 전화해달라고 부탁하신다”며 “하지만 찾아오는 가족은 거의 없다”고 얘기했다.
오전 11시께 양로원 대강당에서는 한복을 입은 양로원 직원들이 노인들에게 세배했다. 그리고 노인들을 꼭 껴안으며 시설에서 마련한 용돈을 나눠줬다. “어르신 건강히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응 고마워!”
이틀 뒤인 설날. 양로원은 조용했다. TV 소리만 들렸다. 방 앞마다 노인들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날 당직이었던 한 요양보호사는 “오늘 마흔 한 명 어르신들 가운데 다섯 분만 가족들이 모시러 왔다”고 얘기했다.
김 할머니는 많이 초조해 보였다. 자꾸만 창밖을 내다봤다. “오늘 딸애가 오는지 모르겠네. 바쁘니깐 안 올 수도 있고”
오후 1시께. 딸네 가족이 김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 할머니는 연신 먹으라고만 했다. “이 귤 먹어봐. 이 빵도 먹고” 하지만 손자들은 할머니가 주는 음식들을 잘 안 먹는 듯 했다.
10여분 뒤 방문이 열렸고, 할머니는 시설 밖까지 나가서 딸네 가족을 배웅했다. 할머니는 한참이나 딸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설 사무국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이 명절에는 자식들 집에서 며칠씩 있다 오기도 했다”며 “최근엔 어르신들을 찾는 가족들이 뜸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할머니가 딸을 기다린 시간은 길었지만, 만남은 그 기다림에 비해 너무 짧았다. 이곳 양로원의 다른 노인들도 1평 남짓 조그마한 방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식들을 기다린다. 아마 다음 설에도 누군가의 할머니이자 어머니는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