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은 있다”
뜸했던 휴대폰 문자 공세 시작
선거철 ‘그들의 축제’ 관심 없어
혹시 했던 기대 역시 배신감
정치인이 속일지라도 분노말자
‘큰 바위 얼굴’은 우리 자신
설연휴 우리의 힘 확인 시간 기대
2016년 1월1일 새해맞이 각종 행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지옥 같은 곳이라는 ‘헬(hell) 조선’,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라는 말들이 회자되던 지난 한 해였기에 그만큼 간절함으로 맞이한 새해의 첫날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그 잠깐의 새해 소망도 용인하지 않는 일들이 또 다시 우리를 분노케 하고 또 좌절하게 만든다. 모든 이벤트가 이벤트화한 후에는 더 이상의 감동으로 남기 어려운 것처럼, 특히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선거철이 온 모양이다. 한동안 뜸했던 휴대폰에 시도 때도 없이 문자가 날아든다. 한번 만 더 오면 그 후보는 안 찍겠다고 다짐도 해 본다.
그들의 ‘축제’에는 정말 관심이 없다. 슬픔에 잠긴 대중이 주어진 삶의 문제를 남에게 덮어씌우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 좌절한 지식인의 현실도피 때문도 아니다. “지옥에 가장 넘쳐나는 부류가 정치인”이라는 중세 이탈리아의 문호 단테의 험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번 총선에 관심을 가져 본들 뭐가 달라질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후보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일단 유권자를 하늘같이 떠받들겠다며 먼저 손을 내민다. 다음에는 그야말로 화려한 공약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평생 서민들만 생각한 최고의 머슴임을 역설하는 수사로 덧칠한다. 마지막으로 당선만 되면 초심을 잃지 않고 민초와 함께하겠다며 눈물겹도록 호소한다.
허나 누가 ‘스테레오타이프(stereotype)’의 전술을 믿겠는가? 지금까지 이 과정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다면 20대 국회라고 해서 달라질까?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의회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 번은 외과수술적 의회개혁이라는 엉뚱한 묘안을 내놓았다. 맨날 당리당략으로 싸움만 벌이는 강성 국회의원 100명을 뽑는다. 그리고 의사에게 부탁해서 그들 뇌를 반쪽으로 가른 다음 서로에게 이식시켜 봉합하는 것이다. 그러면 맨날 싸움질 하던 양쪽 뇌가 합쳐졌기 때문에 중용과 타협의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탁견 중에 탁견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슬픈 코미디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총선에 우리는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럴 수는 없다. 후보자들을 믿어서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유권자이다.
인류 역사는 나의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5분이면 끝나는 너무나 일상적인 나의 한 표 행사이지만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바꾼 쟁취의 결과물이다.
옛날 우리 같은 사람은 투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선거란 오직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영국’도 엘리자베스 시대(1558~1603년)에만 해도 아무 도시나 대표를 뽑을 수도 없었다. 세금을 많이 냈던 도시에게만 한정된 특권이었다.
이런 생각하면 정치인들이 아무리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정치인들의 환골탈태를 기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꿈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정치판이 난장판이라 해도, 그 판을 벌일 여의도 장터에서 나 역시 유권자의 힘이 그 어딘가에 있다는 소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가 그토록 기다렸던 큰 바위의 얼굴은 입신출세하여 고향을 찾은 사람도, 엄청난 돈을 모아 금의환향한 사람도 아니었다. 인고의 세월, 고향을 묵묵히 지켜온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다. 어니스트처럼 제주도를 지켜가는 우리들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제 설 연휴가 시작된다. 비록 짧은 연휴 동안이지만 가족들과 함께 우리의 힘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