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는 걸 좋아하기로 했다”
행복거리 더 많이 찾아야
문제는 ‘욱’하는 매우 급한 성미
화를 다스릴 지혜가 필요
불의에 화내는 사람도 불행
더불어 사는 사람과 싸우는 셈
귀를 열고 진심을 받아들이자
우리 집 늙은 귤나무는 소나무인양 늘 푸르르다. 주홍빛 꽃 같은 주머니 속에 새콤하고 달콤한 즙을 가득 담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양 의연하다. 그에 비하면 이파리 하나 안 남은 채로 아직 떫은 감을 달고 있는 감나무가 애처로울 지경이다.
남은 귤들을 따러 함바가지를 들고 나섰다. 바지직 바지직 삭정이 밟히는 소리에 놀란 꿩들이 후드득 날아오르는 바람에 소녀처럼 “엄마야!” 하고 놀랐다. 벌써 40대 후반인 나이가 무색하게 나는 언제나 이놈들에게 놀란다.
마음의 준비를 해도 소용이 없다. 마치 나이를 먹는 일과도 같다. 뻔히 가는 세월을 보면서 너무 빨라서 놀라고 새해가 올 때마다 “헉 내가 벌써 몇 살이라니!”하고 놀란다.
이 나이에도 나는 가끔 남이 보면 배꼽잡고 비웃을 일을 저지른다. 꿩을 잡아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데 민첩함이라곤 찾아볼 수없는 체력에 금방 녹초가 되고, 가는 세월 잡아보겠다고, 나잇살 좀 빼보겠다고 매일 다짐하지만 떨어진 순발력만큼이나 지루한 다짐이 될 뿐이다. 떫은 감을 달고 있는 앙상한 감나무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감나무는 밤나무를 꿈꾸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이 드는 걸 좋아하기로 했다. 어찌 하겠는가.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을.
다만 이 나이 드는 삶을 즐기려면 행복할 거리를 더 많이 찾아야 하리라. 행복할 거리를 만드는 일은 젊었을 때 많이 시도했고 힘들었고 실수가 많았고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가만히 바라만보아도 좋은 행복거리를 찾아야겠다.
아니 이미 내 주변엔 그러한 것들이 넘쳐나는데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건 아마도 욱하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가슴속에 뜨거운 불길을 조절하지 못하는 급한 성미 때문이리라.
나이 들면서 오히려 거세지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나를 잠식했었다. 세월호가 그랬고 메르스가 그랬으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물론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괜찮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실은 참 별 볼 일 없는 인간임을 발견할 때 그런 상황에 빠진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점점 익숙해졌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가진 마음의 질병 ‘화’, 나의 만성병이 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먼저 화를 다스릴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노에 대한 나의 합리화와 정당화는 집요했다.
그런데 이것을 꺾은 이는 격정의 세월을 살았던, 폭군(暴君)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가였던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였다. 그는 유배기간동안 화를 잘 내는 동생을 위해 화에 대한 책을 쓴 후 네로의 처형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증기 솥 안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는 “화를 내는 것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일단 뛰어내리면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며 하강하는 힘에 저항하거나 곤두박질하는 몸의 속도를 늦출 수가 없다. 숙고와 후회의 여지는 사라지고 뛰어내리기 전이라면 거부할 수도 있었을 냉혹한 결과를 맞이할 뿐이다.
화를 다스려 이성을 갖추어야만 제대로 된 심판을 하고 본보기가 될 단죄를 할 수 있다. 불의에 화를 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책망해야 할 일이 눈에 띄지 않는 순간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을까? 탐욕스러운 자, 방탕한 자, 악덕에 편승해 이익을 챙기는 자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아마 분개할 광경과 마주치지 않고는 어디 한군데 눈길 둘 곳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검투사 학교와 전혀 다를 게 없어서 자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평화는 없다.
어째서 이 지혜로운 잠언들은 비밀스런 귓속말만큼이나 들리지 않았는지. 나는 이제 귀를 더 열고 사람들의 진심을, 자연의 진심을 더 들으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싶다. 젊었을 때는 늙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하다. 젊었으니까. 그런데 늙어보니 늙는 것도 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