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 '목호 토벌'로 몽고 탐라지배역사 마감
목호의 난(牧胡의 亂)
목호는 제주도 목장에 파견되어 말을 사육했던 몽골인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 공민왕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 그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 등 관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공민왕5년(1356)에도 난을 일으켜 도순문사 윤시우, 목사 장천년, 판관 이양길을 죽였으며, 공민왕 11년(1362)에도 목호들이 성주 고복수를 꾀어 난을 일으켰다.
명나라는 제주마 진상(進上) 2000필을 요구해 몽골목호(石迭里必思, 肖古禿不花 등)들이 반명(反明)위세로 1374년 7월 14일에 말 300필만 보내고 이들이 횡포와 반란을 일삼으므로 과감한 반원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은 원의 국세가 약화되어가자 군사를 동원하여 목호토벌을 감행했다.
공민왕 23년(1374년 7월 25일) 칙서를 내려 최영장군을 도통사로 삼아 전함 314척에 병사 2만5605명을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케 했다.
토벌군이 명월포(현 한림읍 한림포구)를 향해 오자 목호세력은 기병 3000여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한다. 이들 목호군에는 마을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탐라여자 사이에 태어난 반 몽골족화된 탐라민, 고려 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을 탐라민도 가세했다.
최영장군은 목호무리의 항복을 권유하는 회유활동을 벌인 뒤, 먼저 11척에 탄 군사를 해안에 상륙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목호군에게 전부 살해되었다.
이를 본 군사들이 머뭇거리며 진격을 하지 않자, 최영장군은 하급 장교를 베어 조리돌리는 일까지 감행한다. 그 후부터 토벌군은 목호군에게 돌진해 물리치고 패잔병도 쫓아가 죽여 많은 말을 빼앗았다. 이에 목호군은 안무사 이하생을 살해하여 각오를 다진 다음 명월포에 주둔한 토벌군을 공격했다.
명월포에서 상호 격전을 치른 양군의 전투는 명월촌으로부터 어름비·밝은오름·검은오름·새별오름·연랠홍로·호도(범섬)로 이어지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서귀포 범섬으로 들어간 목호군 지도자들은 항복하거나 자결함으로서 목호토벌은 끝나게 되었고 몽고의 탐라지배 1백년 역사가 마감된다.
제주마필의 진상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민왕 23년 4월 무신조의 원조(元朝)때 2, 3만 필의 말을 탐라에 목양하였다는 데에서 대략 추측할 수가 있다.
제주목장에서는 몽골에서 보내온 호마와 함께 재래종인 탐라마를 목양하여 좋은 말은 왕실의 어승마로 이용하거나 문무 관료들에게 내려주었고 또 원나라에도 보내었다. 특히 원이 제주목장을 직할하였고 충렬왕 14년에는 축자장별감을 설치하여 매년 많은 수(數)의 제주마를 징발해감으로써 고려 조정과 제주도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고려사 권82).
고려사에 보면 탐라마를 바쳤다는 것과 원 태복시에 탐라마를 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원나라에 보내는 제주마는 끊이지 않았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고려 말에 제주도의 말 수송능력은 일시에 1000여필을 수송할 수 있는 능력과 공마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은 제주마 2000필을 수시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마를 수송할 수 있는 항구는 대정현의 당케(현 서귀포시 대포항), 정의현의 서귀항, 당케(현 표선면 표선포구), 제주목에는 조천포(현 조천항, 한림읍 명월포) 등이 유명하였다.
따라서 원과 명에 진상한 말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도움자료;제주도목장사, 제주도제주마, 수산향토지)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것을 비유한 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함.
[출전]『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내용]=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음모를 꾸며 시황제의 장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즉위시키고 경쟁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다. 역심이 생긴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어느 날 사슴을 가지고 와서 이세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말입니다” 하니 이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이 잘못 안 것이냐? 사슴을 일러 말이라니.”하고 좌우에게 물으니 좌우에서 어떤 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어떤 자는 ‘말입니다’라고 하여 조고에게 아첨하고 순종하였으며 그 중에는 ‘아닙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져서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게 되고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孀)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으나(B.C. 207).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참고]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할 때 이 지록위마의 고사가 흔히 인용되었다. 이것이 요즘에 와서는 그 뜻이 확대되어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최영장군 사당(제주도 기념물 제11호, 추자면 대서리 산 115번지)
최영장군을 국토수호신으로 추앙하기 위해 세운 신당으로 ‘조국군통대장 최영장군’이라는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
추자면에서 사당을 모시게 된 것은 목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제주를 향하던 중 풍랑으로 잠시 머무르면서 어민에게 고기 잡는 방법 등을 가르쳐 준데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생명자원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제주마주협회고문)